미국에서도 저자가 취직이나 승진을 앞두고 발표하는 논문들은 야심적이고 긴 경우가 많다. 오늘은 그런 논문 한편을 소개한다. James An, Substance and Process in Corporate Law (2023) 저자는 명문 Stanford Law School의 강사인데 홈페이지에 약력이 소개되어 있지 않아 더 자세한 경력은 알 수 없지만 중국계의 젊은 학자로 추정된다.
논문은 86페이지로 방대할 뿐 아니라 다루는 범위도 제목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극히 포괄적이다. 회사법분야에서 미국의 법원, 특히 델라웨어주 법원이 경영자의 의사결정에 대한 실체적 판단을 자제하고 그 결정의 절차(process)에 초점을 맞추는 절차적 접근방식을 취하고 있는 점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이 논문은 이처럼 회사법분야에서 주류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절차적 접근방식의 한계에 관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저자는 내용(substance)과 절차가 서로 무관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서로 얽혀 있는 경우도 없지 않음을 강조한다. 그리하여 법원이 기준이 모호한 내용에 대한 판단을 피하기 위하여 절차적 접근방식을 취한다고 해도 효과적으로 주주이익을 보호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고 주장한다.
서론과 결론을 제외한 논문의 본문은 4개의 장으로 구성된다. I장과 II장은 법원의 심사대상인 경영상의 의사결정을 합병과 같이 경영권 이전이 수반되는 거래(I장)와 계속기업으로서의 거래(II장), 두 가지로 나누고 각 경우에 구체적인 거래유형과 관련하여 절차적 접근방식이 어떻게 수용되고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차의 판단에 내용적 요소가 얼마나 개입될 수 있는지를 검토한다. III장에서는 이러한 검토에서 얻은 교훈을 정리하고 IV장에서는 그런 교훈을 몇 가 법적 논점에 적용하는 문제를 논의한다.
I장에서 저자는 경영권 이전에 관한 이사회의 결정에 대해서는 주주보호를 위하여 보다 엄격한 심사기준을 적용한다고 지적하며 다음과 같은 예를 든다. ①이사회가 회사를 매각하기로 하는 경우에는 이사회는 주주를 위해서 최고의 가격으로 매도할 수 있는 절차를 밟을 의무가 있다(Revlon의무). ②주주는 회사에 대해서 공정한 가격에 주식을 매수할 것을 청구할 수 있다(주식매수청구권). ③경영권 이전을 방지하기 위한 이사회의 결정(예컨대 poison pill)에 대해서는 보다 높은 심사기준(Unocal)을 적용한다. ④지배주주나 경영진이 다른 주주를 축출하고자 하는 거래에서는 가장 엄격한 기준인 전체적 공정성기준을 적용한다. 저자는 이상의 사례들을 소재로 삼아 절차적 접근방식의 한계를 논한다. 예컨대 주식매수청구권의 경우 공정한 가격 산정과 관련하여 현금흐름할인방식 대신 거래가격(deal price) 채택하는 것은 일종의 절차적 접근방식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거래가격의 공정성을 훼손할 수 있는 요소들이 많고 그에 관한 다툼을 해결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2021.6.23.자 포스트 참조)
계속기업의 거래에 관한 II장에서는 주의의무에 관한 Van Gorkom, Disney 등 판결과 감시의무에 관한 Caremark, Marchand 등의 판결을 검토한다.
III장에서는 먼저 법원이 절차에 초점을 맞추게 된 이유의 설명에 이어 절차의 공정성에 대한 법원의 판단이 잘못될 수도 있음을 지적하고 그 예로 Van Gorkom판결을 든다. 저자는 절차법적 접근방식이 반드시 단순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즉 절차가 충분한 것인지 여부에 대해서는 일도양단적으로 결정할 수밖에 없는데 그 결정은 내용적 요소를 고려해야 한다는 점에서 간단하지 않다는 것이다. 저자는 그 예로 breakup fee와 같은 거래보호조항의 적법성을 든다.
IV장에서는 이러한 교훈을 고려하여 다음 네 가지의 문제상황을 재검토한다. ①공정한 절차를 통해서 공정한 가격을 산정할 때 공정한 절차의 의미는 무엇인가; ②포이즌 필; ③Corwin판결; ④Marchand, Caremark판결들과 절차의 내용. ①에서 특히 눈길이 간 대목은 공정한 절차를 위반한 경우의 배상에 관한 설명이었다(68면 이하). 저자는 거래가격이 공정한 범위에 속한 경우에도 절차가 불공정하다는 이유로 “보다 공정한” 가격과의 차액의 배상을 인정한 판결을 인용한다(Dole Food, 2015 WL 5052214, at *2). 그럼에도 이런 판결은 예외에 속한다고 하는데 저자는 그 이유를 절차의 불공정으로 인하여 회사가 더 고가에 매각할 기회를 상실했다는 주장을 원고측 변호사가 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추측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