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의 원칙(또는 신뢰의 권리)라는 것이 있다. 여러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현대 사회에서는 다른 사람과의 분업 내지 협동이 필수적이다. 분업이나 협동이 성립하려면 타인의 작업에 대한 신뢰가 불가피하므로 타인의 작업을 신뢰한 자를 법적인 책임으로부터 보호할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등장한 것이 바로 신뢰의 원칙(Vertrauensgrundsatz)이다. 원론적으로 신뢰의 원칙은 다수의 협동이 문제되는 모든 분야에서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여지껏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형법, 의료법 분야에서 논의되었을 뿐 회사법분야에서는 그에 관한 논의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 귀중한 예외가 정대익교수의 논문(법률자문의 신뢰와 이사의 책임조각 가능성, 비교사법 23권 4호(2016) 1803면)이다. 일본에서는 간혹 회사법문헌에서 간단하게나마 그에 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있었는데 최근 상사법무에 제법 상세하면서도 유익한 문헌이 한 실무가에 의하여 발표되었다(倉橋雄作, 経営判断原則と信頼の原則を「よき意思決定」に活かす〔上〕, (下) 2369, 2370호). 반가운 마음에 그것을 소개할까 생각했으나 보다 체계적이고 포괄적인 논문이 없을까 찾던 중 마침 조금 전에 발표되긴 했지만 적합한 독일논문을 발견하였다. Stephan Harbarth, Unternehmensorganisation und Vertrauensgrundsatz im Aktienrecht, ZGR 2017, 211–238. 저자는 논문발표 당시에는 로펌 파트너였는데, 구글로 검색하니 놀랍게도 현재는 연방헌법재판소 소장으로 재직 중이라고 한다.
논문은 서론과 결론을 제외하면 6개의 장으로 구성된다. II장에서는 이사(경영이사회 구성원)에 의한 위임을 ①횡적 위임(동료 이사에 대한 위임), ②종적 위임(내부 부하직원에 대한 위임), ③외부 위임(외부전문가에 대한 위임)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정교수의 위 논문은 주로 ③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III장에서는 신뢰의 원칙에 관한 일반론을 서술한다. III장은 ①신뢰의 원칙의 내용, ②법리상 기초, ③형법과 불법행위법 등 다른 분야에서의 논의상황을 검토한다. ①과 관련해서 신뢰의 원칙은 누구도 타인이 잘못할 것임을 알 수 없는 한 그 타인의 도움을 받아 임무를 수행하는 것을 허용한다. 저자는 문제는 법원이 타인이 주의를 다해서 행동할 것이라고 믿은 당사자의 신뢰를 어느 범위까지 보호할 것인가라고 본다. IV장에서는 미국법상의 신뢰의 원칙을 살펴본다. 주회사법상 reliance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이사의 신뢰를 보호하는 규정을 검토한다. V장은 회사조직에서의 신뢰의 원칙을 다루는데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따로 언급한다. VI장에서는 입법론으로 신뢰의 원칙을 명문으로 도입할 필요가 있는지를 논한 후 그 필요를 부정한다. VII장에서는 정관에 의한 자치가 허용되는 한도를 검토한다.
이 논문의 핵심인 V장에서는 여러 논점을 다루고 있지만 흥미로운 것만 간추리자면 다음과 같다. ①신뢰의 원칙의 근거는 기본적으로 그것이 회사의 이익에 부합한다는 점에서 찾는다. ②신뢰의 원칙은 객관적으로 이사에게 제공된 정보뿐 아니라 타인의 업무수행에 대해서도 적용된다. ③위임을 받은 자는 신뢰성과 독립성을 갖춰야 한다. 신뢰성에는 능력도 포함된다. ④위임받은 자에게는 충분한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⑤위임받은 자가 제공한 정보나 업무의 수행에 대해서 이사는 신뢰하기 전에 어느 정도 검증할 의무가 있다. ⑥정당한 신뢰의 범위와 한계는 결국 개별 사안의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다만 맹목적인 신뢰는 어떠한 경우에도 허용될 수 없다. ⑦신뢰의 원칙에 의한 보호를 받기 위해서 반드시 이사 자신이 의무를 제대로 이행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⑧회사의 위기상황이라고 해서 신뢰의 원칙의 적용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⑨신뢰의 원칙은 책임의 조각사유라기 보다는 위법성의 조각사유이다.
하르바르트는 위 논문 쓸 당시에 CDU의 원내부대표였지요.
고맙습니다. 이렇게 빨리 반응이 있으리라고는 전혀 예상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