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회 중심의 계약설적 회사관

근래 ESG나 회사의 목적을 둘러싼 논의가 맹위를 떨치고 있지만 그래도 적어도 미국의 회사법학계에서는 계약설적 회사관이 여전히 주류적 지위를 누리고 있다. 계약설적 회사관은 미국을 넘어 일본과 우리나라 학계에도 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지만 정작 그 자체에 대한 전반적인 소개는 별로 이루어진 적이 없는 것 같다. 오늘은 비교적 짧으면서도 계약설적 회사관의 개요를 보여주는 최신 논문을 소개하기로 한다. Stephen M. Bainbridge, Board-Centric Contractarianism(2025). 저자는 주주이익우선주의(shareholder primacy)의 강력한 대변자인 동시에 대표적인 이사회우선주의자로 이미 소개가 필요 없을 정도로 저명한 회사법학자이다. 단행본의 한 챕터로 쓰여진 이 논문에서 저자는 계약설의 전개과정과 회사법상의 의미를 살펴본 후 이사회 중심주의와 계약설과의 관계를 논한다. 논문은 본문이 약 20페이지 정도로 짧지만 계약설에 관한 기본적인 경제학 및 법학분야의 문헌을 폭넓게 인용하고 있을 뿐 아니라 주요 논점들을 충실하게 짚어 주고 있어 최소의 노력으로 이 테마에 대한 큰 그림을 이해하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안성맞춤이다. 다만 저자가 주창하는 이사회중심주의에 대한 반론으로 주주의 발언권을 더 강화해야 한다는 Bebchuk교수를 비롯한 학자들의 견해에 대한 언급이 없는 점은 다소 의아하다.

논문은 통상 5~6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일반 논문과는 달리 다음과 같은 20개의 단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제목만 보아도 대강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으리라 여겨지므로 그 단락들에 번호를 붙여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1. 서론

2. 다양한 회사(법인)이론들

3. 법인의제설과 특허설

4. 특허설의 퇴조

5. 법인의제설의 제한적이지만 지속적인 타당성

6. 법인실재설

7. 회사를 고리로 연결된 계약들로 파악하는 계약설

8. 시발점으로서의 Coase의 견해

9. Alchian과 Demsetz의 견해

10. Jensen과 Meckling의 견해

11. Easterbrook과 Fischel의 견해

12. 계약설의 바탕에 깔린 전제

13. 회사의 본질 및 회사법의 역할에 대한 함의

14. (계약설의) 지속적인 영향력

15. (계약설에 대한) 비판

16. 연결고리로서의 회사

17. 회사는 연결고리를 가진다

18. 명령에 의한 지휘권을 갖는 연결고리는 계약설과 모순되지 않는다

19. (회사법상) 누가 연결고리인가?

20. 결론

이들 단락 중에서 가장 지면을 많이 차지하는 것은 위 17의 회사가 연결고리를 가진다는 단락으로 무려 15면에서 19면에 걸쳐 있다. 이 부분이야말로 이사회중심주의에 대한 저자의 사고를 잘 보여주고 있다고 여겨지므로 그 내용을 간단히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회사의 다양한 구성원들(constituencies)은 서로 간에 직접 소통하거나 계약을 체결할 수 있는 통로가 없으므로 각 구성원은 결국 회사의 중심적 연결고리와 계약관계에 서게 된다. 여기서 중심적 연결고리가 되는 것은 결국 사람이고 저자는 그 사람이야말로 명령권한(power of fiat)을 가진 중심적 결정권자라고 본다. Coase에 의하면 경제활동이 시장에서 이루어질 것인가 아니면 기업내부에서 이루어질 것인가는 거래비용의 크기에 좌우된다. 그 비용은 ① 교섭에 수반되는 탐색 및 기타 거래비용, ②양당사자 사이의 배타적인 거래관계에서 발생하는 기회주의적 행동의 비용, ③불확실성과 복잡성으로 인하여 완전한 계약을 작성할 수 없기 때문에 발생되는 비용 등으로 나눌 수 있다. 팀의 특정 구성원에게 회사의 자원을 활용하는 방법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위임함으로써 이러한 비용을 감소시킬 수 있는 경우에는 회사가 시장보다 효율적일 것이다. 명령권을 갖는 중앙의 결정권자, 즉 연결고리를 마련함으로써 회사는 사전적인 계약의 시스템을 사후적인 가버넌스의 시스템으로 대체한다. 명령권 있는 주체가 없더라도 조합이나 소기업에서라면 구성원 사이의 협동이 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공개회사에서는 명령권을 가진 주체, 즉 연결고리가 필수적이다. 주주는 이해관계나 보유하는 정보의 수준이 다양하고 의사결정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데 필요한 정보를 충분히 수집할 인센티브가 없기 때문에 주주를 그러한 연결고리로 삼는 것은 부적절하다. 반면에 경영자들은 회사의 흥망성쇠에 밀접한 이해관계를 갖고 분산투자를 하는 기관투자자들과는 달리 그 위험을 분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주주들이 소수의 경영자에게 의사결정권한을 위임하는 것이 보다 저렴하고 효율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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