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nald Gilson, 뮤추얼펀드 그리고 채점

유학에서 갓 돌아와 교수로서의 일거수일투족이 어설프기 짝이 없던 초년병 시절의 일이다. 제대로 배워본 적도 없는 과목을 배정받아도 찍소리 할 수 없는 처지였다. 교실에 들어가기 직전까지 강의노트를 – 그 때만해도 개인컴퓨터가 없었다! – 다듬느라 진땀을 흘린 날이 많았다. 당시에는 도대체 얼마만큼 준비해가야 정해진 시간을 채울 수 있을지 감이 잘 오지 않았다. 그래서 강의시간이 끝나기 전에 들고 간 재료가 떨어져버리면 어쩌나 하는 염려가 늘 떠나질 않았다. 그렇다고 마냥 강의노트 양을 늘리기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루는 교수휴게실에서 차를 마시다 이런 고민을 토로했더니 곁에 있던 선배가 껄껄 웃으며 딱하다는 투로 답했다. “김교수, 너무 원액(原液)만 쓰는 모양이네. 적당히 물을 타가면서 가르쳐야지 계속 원액만 들이부으면 학생들이 감당이 안돼요.” 30여년에 걸친 강의인생 내내 간직한 참으로 값진 충고였다. 그간 내 강의를 거쳐 간 수많은 학생들도 이 실용적인 가르침의 간접적인 수혜자가 되었을 것이다. 큰 깨우침을 얻은 후론 강의용 희석제를 마련하는데도 내심 신경을 쓰게 되었다. 차츰 관록이 붙음에 따라 나도 나름 각종의 물을 갖춰두고 상황에 맞춰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자연히 중간에 밑천이 떨어지는 불상사에 대한 저급한 걱정 따위도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말년에는 오히려 자칫 물 타는 재미에 정신이 팔려 진도를 못 마치는 것을 경계해야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젠 퇴직한 처지라 강의할 일도 없어졌으니 물을 섞을 기회도 사라지고 말았다. 오늘은 서가에서 아끼는 장서를 꺼내 기증하는 심정으로 장기간 애용하던 희석제를 하나 독자들에게 공개하기로 한다. 이야기는 Ronald Gilson이란 유명한 회사법학자로부터 시작된다. 나와는 오랜 친구 사이로 늘 그냥 Ron이라고 부르고 있으니 여기서도 그렇게 부르기로 하자. Ron은 원래 Stanford대 교수로 시작했으나 나중에는 Columbia대 교수를 겸하며 한 학기씩 샌프란시스코와 뉴욕을 오가며 가르치는 특이한 생활을 했다. 그는 워낙 유명해서 글을 통해서는 1980년대 초부터 알고 있었지만 처음 만난 것은 1997년 파리에서 열린 소규모 워크샵에서의 일이다. 그 후 세계 각지에서 만나며 부부간에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그는 인품도 훌륭하고 실력도 뛰어나지만 오늘은 그의 취미인 하이킹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기로 한다.

Ron은 하이킹을 몹시 좋아해서 1997년 가을 그가 서울대를 방문했을 때는 함께 관악산을 오르기도 했다. 그때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며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요즘 하루가 멀다하고 검색하고 있는 SSRN에 대해서 처음 알게 된 것도 그 때의 일이다. 별 생각 없이 최근 재미있게 읽은 책이 있냐고 물었더니 대뜸 Jon Krakauer의 “Into Thin Air: A Personal Account of the Mt. Everest Disaster”란 신간을 추천했다. 미국행 비행기 속에서 읽었는데 워낙 흥미진진해서 잠도 안자고 빠져들었다. 그 책은 바로 영화화되었는데 최근에야 우연히 그것을 보게 되었다. 하지만 원작에서 받았던 첫 감동이 워낙 컸던 탓인지 영화에선 별로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Ron은 특히 미국 서부의 Sierra Nevada산맥을 좋아했다. 스페인어로 눈 덮인 산자락이란 뜻인 Sierra Nevada는 스페인 안달루시아지방에도 있는데 그가 보내온 화보집을 보니 그들 부부가 오른 John Muir Trail은 바위와 폭포, 호수와 설원이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그곳 트레킹을 – 내가 아는 것만 해도 – 두 차례나 했고 그곳에 산장도 가지고 있다. 트레킹이라고 해도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라 2주 동안 각자 짐을 지고 능선을 따라 걸어가는 코스이다. 인상적인 것은 음식은 가지고 가지 않고 대신 코스 중간 중간에 배달되는 햄버거로 해결한다는 사실이다. 햄버거는 나귀가 운반하기 때문에 자기들이 먹는 햄버거로는 맛은 별로라도 가장 비싼 값을 치르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나로서는 2주간 산길을 걸어야하는 것도 내키지 않았지만 아무리 절경을 누빈다고 해도 2주 내내 햄버거를 먹어야한다는 것이 끔찍해서 감히 시도해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이들이 트레킹에 음식을 가져가지 않는 이유는 그 지역에 사는 불곰(grizzly bears)때문이기도 하다. 구글 검색에 따르면 불곰은 최고 시속 35마일로 달릴 수 있다고 하니 인간의 최대시속인 27.8마일 보다 훨씬 빠르다. 불곰은 멀리서도 냄새를 잘 맡기 때문에 음식을 가져가면 굶주린 불곰과 마주칠 공산이 크다. 그래서 음식은 불곰의 손(또는 발?)이 미치지 못하는 높은 나뭇가지에 줄을 걸어 매달아놓아야 한다는 것인데 아무튼 번거롭고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강의에서 이런 이야기까지 하는 건 희석제에 또 물을 타는 격이기 때문에 여간 여유가 있지 않고서는 건너뛰는 것이 보통이다. 결국 알맹이는 Ron이 들려준 다음 이야기이다. 어느 날 산에서 캠핑을 하던 두 친구가 멀리서 불곰이 다가오는 것을 발견했다. 서둘러 텐트에서 나와 맨발로 도망가려 하는데 다른 친구가 따라오질 않았다. 뒤를 돌아보니 운동화를 신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빨리 도망가자고 소리쳤더니 그 친구가 씩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나는 너보다만 빨리 달리면 돼.”

그냥 웃어넘기기에는 뭔가 씁쓸한 맛을 남기는 이 씨니컬한 이야기는 바로 뮤추얼펀드의 행태에 딱 들어맞는다는 것이 Ron이 덧붙인 말이었다. 뮤추얼펀드의 수익은 운용성과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운용자금의 규모에 비례한다. 따라서 절대적인 수익률을 높이는 것보다는 경쟁사보다 조금이라도 높은 수익률을 올리는데 심혈을 쏟는다. 돈은 조금이라도 높은 수익률을 따라 움직이기 때문이다. 이런 여건에서는 뮤추얼펀드가 투자한 기업의 운영방식에 불만이 있어도 행동에 나서기는 어렵다. 개입활동의 비용은 오로지 자신의 몫임에도 불구하고 그로 인한 이익은 자신이 독점하지 못하고 방관하던 경쟁사들과 같이 나눠야하기 때문이다. 즉 이른바 무임승차(free ride)의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한 때 미국을 비롯한 여러 선진국에서 뮤추얼펀드와 같은 기관투자자들이 나서서 전문경영인의 방만한 경영을 견제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품었던 시기가 있었다. 일반 소액투자자와는 달리 이해관계도 크고 전문성과 자금력까지 갖춘 기관투자자에게 그런 역할을 기대했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런 기대에 힘입어 법학 쪽에서도 기관투자자에 관한 논문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현실적으로 기관투자자, 특히 뮤추얼펀드는 이런 기대를 완전히 저버리고 투자자를 위한 행동에 나서지 않았다. 그 주된 이유는 뮤추얼펀드의 인센티브가 바로 위 이야기에 등장하는 냉정한 등산객의 경우와 별 차이가 없었던 것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뮤추얼펀드에 관한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2000년대 들어서부터 새로운 진전을 보이고 있다. 사정이 변화한 계기는 이른바 hedge fund activism의 대두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 주목을 받은 것이 Ron이 Columbia대 동료인 Gordon교수와 발표한 논문(The Agency Costs of Agency Capitalism: Activist Investors and the Revaluation of Governance Rights, 113 Columbia Law Review 863(2013))이다. 이들은 뮤추얼펀드가 자발적인 행동에 나서지는 않지만 헤지펀드가 앞장 서는 경우에는 그들을 지지하는 역할은 마다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했다. 경영진에 대한 개입을 주도하는 것은 비용이 들기 때문에 자제하지만(이른바 합리적인 침묵(rationally reticent)) 헤지펀드를 따라 단순히 표결에 동참하는 것은 비용이 들지 않기 때문에 구태여 자제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헤지펀드가 앞장서고 그 뒤를 뮤추얼펀드들이 따르는 현상이 나타났는데 이를 이른바 “wolf pack”(사냥하는 늑대 무리)이라고 한다.

이 스토리는 그저 학생들의 졸음을 쫓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교육적가치도 지닌 것이기에 애써 일궈 온 국제교류의 성과로 치부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Ron이 들려준 이야기 중에는 교육적인 것만 있는 건 아니다. 언젠가 그에게 채점이 갈수록 지겨워진다고 속내를 털어놓았더니 자기 동료들 사이에서는 교수의 강의는 무료로 하는 것이고 봉급은 채점수당으로 받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며 웃었다. 채점의 괴로움은 동양이나 서양이나 다를 바 없다는 말에 다소 위안을 받기는 했다. 그런데 금년 초 호주 모나쉬대학을 방문했을 때 그곳 교수로부터 똑 같은 이야기를 듣고 고소(苦笑)를 참았다. 온 세상 선생들이 모두 채점에 시달리고 있음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일생을 학교주변을 맴돌았으니 채점에 얽힌 비화는 따로 자리를 마련해야할 만큼 많다. 학교를 떠나는 내 마음을 달래준 것이 바로 이젠 채점의 고역에서 드디어 해방되었다는 생각이었다. 물론 그 대신 더 이상 채점수당도 받을 수 없게 되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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