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회사법상 충성의무의 변천에 관한 통설의 재검토

며칠 전 어느 로스쿨 교수와 잡담을 나누던 중 그가 최근 미국 회사법학계에서는 이익충돌거래에 관해서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다며 그 이유를 궁금해 했다. 그 때까지 나는 그런 점을 의식하지 못했으므로 그 점에 대해서 생각해본 일도 없었다. 그런데 적어도 미국의 상장회사의 경우에는 이미 이익충돌거래를 억제하는 다른 메커니즘이 발달되어 그 자체가 많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학자들의 관심도 줄어든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그 자리에서 그냥 우연히 떠올라 그런 취지로 이야기하고 넘어갔다. 집에 돌아와 블로그에 소개할 글을 찾다가 우연히 우리의 의문을 본격적으로 다룬 글을 만나게 되었다. William W. Bratton, Reconsidering the Evolutionary Erosion Account of Corporate Fiduciary Law (2020). 이 논문은 우리의 문제만을 다룬 것은 아니지만 충성의무(duty of loyalty)의 변천에 관한 논의도 매우 유익하므로 소개하기로 한다.

저자인 Bratton교수는 블로그에서 두 차례 소개한 바 있다(2020.3.30.자; 2020.4.15.자). 이번 논문에 보니 원래 근무하던 U. Penn. 로스쿨에서는 퇴직한 모양이다. 그와는 세인트 루이스 Washington대학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우연히 옆자리에 앉은 일이 있고 훗날 청화대 세미나에서도 아침 식사를 같이 한 일이 있다. 짧은 머리에 운동으로 다져진 날씬한 몸매의 그는 눈매가 날카로워 대화중 내내 긴장감을 자아냈는데 오페라에 일가견을 갖고 있었다. 당시 바그너의 Ring Cycle을 본지 얼마 되지 않은 때여서 바그너 오페라는 너무 접근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자신은 바그너 오페라를 가장 좋아한다고 말하며 짓던 묘한 표정을 잊을 수 없다.

저자는 충성의무의 변천에 관한 통설을 “점진적 침식설”(evolutionary erosion account)이라고 부른다. 그 견해는 1966년 Marsh교수의 논문에서 유래하였는데 그에 따르면 법원이 지난 백여 년에 걸쳐 경영자의 자기거래에 적용되는 신인의무기준을 점점 완화하여 적용한 결과 주주이익을 크게 해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통설에 대해서 Kershaw교수는 최근 영미법상 신인의무의 역사적 발전에 관한 연구서에서 반론을 제기하였는데 그는 신인의무기준의 완화가 경영자계층에 부적절하게 영합한 결과라기보다는 판례법의 전개과정에서 통상 발견되는 실용적인 조정으로 설명한다. 저자는 Kershaw교수의 견해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현대 기업지배구조의 맥락에서 이익충돌과 관련하여 충성의무를 강화할 정책적 필요가 있는가의 문제를 제기하고 그에 대해서 부정적인 결론을 내리고 있다. 저자는 Marsh교수의 논문이 발간된 이후에도 충성의무의 기준은 계속 침식되었고 또 경영자의 자기거래가 주주이익을 증진시킨다고 볼 이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충성의무를 강화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한다. 그 근거로 제시한 이유가 바로 위에서 제시한 우리의 의문과 관련이 있다.

저자는 오늘날 가버넌스시스템 자체가 자기거래를 억제하기 때문에 법원이 구태여 전면에 나설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자기거래를 억제하는 메커니즘으로 저자는 공시규제와 사외이사가 대다수를 점하고 있는 이사회시스템을 든다. 저자는 자신의 주장을 델라웨어형평법원 판례중에서 수집한 공개회사에서의 자기거래에 관한 사례들을 이용하여 뒷받침하고 있다.

논문은 다섯 개의 장으로 구성된다. I장은 내부거래에 대한 규제에서 점점 이사회의 판단이 중요해지는 과정을 서술한 Marsh논문을 소개한다. 그 후의 문헌에서는 자기거래에 대한 규제를 이사회에 맡기는 것은 이사회가 구조적으로 내부자에 편향되어있기 때문에 제대로 작동하기 어렵다는 인식에 따라 거래의 공정성에 대한 법원의 심사를 가로막는 실체법적, 절차법적 장애물은 좋지 않다는 견해가 힘을 얻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II장에서는 Marsh논문이 나온 후에도 신인의무가 계속 후퇴한 과정을 보여준다. III장은 Kershaw의 연구를 설명한다.

IV장에서는 정책적으로 충성의무를 강화할 필요가 있는지에 대해서 검토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저자는 그 필요를 부정하고 그 근거로 자신의 주장을 자신이 수집한 데이터를 제시하고 있다. 저자가 수집한 데이터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기업규모에 따라 각각 31개사를 선택해서 가장 최신 위임장서류에 공시된 자기거래에 관한 데이터이다. 그에 의하면 자기거래에 관한 공시는 많았지만 재무제표에 기재될 만큼 중대한 것은 거의 없었다. 일부 대규모거래는 주로 지배주주가 있는 회사에서 발생하였는데 그 경우에도 사업상의 필요가 제시되었다고 한다. 다른 하나의 데이터는 델라웨어형평법원 데이터베이스에 포함된 모든 충성의무관련사건이다. 1980년대 중반이후 공개회사에서 자기거래에 관한 사건은 손에 꼽을 정도로 소수인데 그 대부분은 M&A에 관한 것이라고 한다. 우리 관점에서 흥미로운 것은 문제의 사건들은 주로 대주주(blockholder)가 지배하는 공개회사에서 발생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회사에서는 앞서 언급한 자기거래를 억제하는 메커니즘이 작동하기 어렵다는 것인데 거의 모든 대기업에 지배주주가 존재하는 우리나라 학자들로서는 공감이 가는 대목이기도 하다. 저자는 이런 기업들에서도 자기거래를 억제하는 시스템이 작동한다는 증거가 있다고 하는데 그런 현상은 우리 대기업에서도 어느 정도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V장에서는 최근 델라웨어 신인의무법의 전개와 관련하여 “점진적 침식”의 의미를 재검토한다. 저자는 이사회 승인을 그저 “구조적 편향”(structural bias)을 들어서 폄하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본다. 그와 관련하여 저자는 전형적인 자기거래, 경영자보수, 지배주주의 의무에 관한 최근 판례의 진전을 소개한다. 그리하여 저자는 델라웨어주법이 한편으로는 자기거래에 대한 이사회 승인의 길을 열어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신인의무를 적용할 대상거래의 범위를 확대하였음을 지적한다. 그리고 공정성 심사를 면제하는 전제로는 독립이사의 지배가 확립될 필요가 있는데 법원이 그 점에 대해서 개별 사실관계에 주목하여 철저히 심사하며 지배주주가 존재하는 경우에는 이사회의 독립성이 부정되므로 이사회 승인이 독립이사 중심의 특별위원회와 주주총회 승인으로 대체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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