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래 신인의무는 강행성이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법경제학적 분석이 부각되면서 신인의무의 강행성에 대한 회의 내지 도전(?)도 힘을 얻게 되었다. 오늘은 사업상 거래에서 신인의무의 강행성 문제에 대해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해주는 짤막한 논문을 한편 소개한다. Brian Broughman, Elizabeth Pollman & D. Gordon Smith, Fiduciary Law and the Preservation of Trust in Business Relationships, in Fiduciaries and Trust: Ethics, Politics, Economics, and Law (Matthew Harding and Paul Miller, eds.,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20).
법경제학에서 신인의무와 같은 일반개념의 근거는 계약의 불완전성에서 찾는 것이 보통이다. 상대방이 재량을 남용할 위험성 있는 경우를 모두 사전에 예측하여 그에 대한 대책을 정해놓는 것은 거래비용 관점에서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런 경우에 적용될 일반개념으로서 신인의무가 효용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처럼 신인의무의 근거를 계약의 불완전성에서 찾는다면 당사자들 사이의 합의로 신인의무의 영역을 축소하는 것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즉 신인의무는 계약으로 수정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강행성을 상실하게 된다. 저자들은 신인의무의 강행성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정당화하고 있다. 그들의 논리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사업적인 관계에서 사업을 지배하는 당사자 甲과 다른 당사자 乙사이에 계약을 체결할 때 甲의 권한남용에 대한 구제수단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교섭하는 것은 甲에 대한 불신을 표시하는 셈이 된다. 따라서 乙은 甲의 권한남용 위험에 불안을 느끼더라도 차마 보호방안을 강구하지 못하게 되는데 이런 상황에서 법제도적으로 그런 보호방안이 제공된다면 甲에 대한 불신을 드러낼 필요가 없어서 편리하다. 신인의무가 바로 그런 강제적인 보호방안인 것이다.
저자들은 신인의무가 소수의 계약당사자들 사이에서는 불신을 막는 유용한 수단이지만 상이한 그룹의 수익자들 사이의 수평적인 이익충돌에 대처하는 데는 적합지 않다고 주장한다. 저자들은 그러한 수평적인 이익충돌이 발생하는 다양한 사례를 들고 있다. 먼저 벤처캐피탈 V를 대표해서 스타트업 X의 이사회에 참여하는 이사 A를 들고 있다. 즉 그런 이사 A는 한편으로는 벤처캐피탈의 수인자(fiduciary)인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스타트업 X의 수인자이기도 한데 신인의무개념만으로는 A가 어떻게 행동해야할지를 규율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 예컨대 V가 X와 같은 업종의 기업인 Y에도 투자하는 경우 그런 행위가 바로 A의 충실의무(duty of loyalty) 위반으로 보지는 않는다. 또 다른 예로는 A가 동시에 여러 스타트업의 이사를 겸하는 경우를 든다. 심한 경우로 한 이사가 18개 회사의 이사회에 이사로 참여하는 사례가 있는데 그 경우 이사가 회사경영에 투입할 수 있는 시간이 제한되므로 이들 이사의 지위 간에 이익충돌이 존재한다. 또한 벤처캐피탈로서는 소수의 성공사례에 집중할 수밖에 없으므로 일부 성공적인 회사 이외의 회사에는 인적, 재정적 지원을 자제할 인센티브가 있는데 이런 이익충돌을 “기회비용 이익충돌”(opportunity-cost conflict)라고 한다. 저자들은 이런 수평적 이익충돌을 해결하는 수단으로 신인의무를 확대적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