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퇴직을 전후해서 오래 문안을 게을리 했던 옛 은사 몇 분을 찾아뵙는 기회를 가졌다. 아직 생존해 계신 분들께는 다행히 예를 올릴 수가 있었으나 작고하신 분들께는 그럴 도리가 없다. 우리 상법학계 1세대를 대표하는 학자이신 정희철 선생도 그 범주에 속하는 분이시다. 학계를 떠나신지 30여년이 지났기 때문에 이젠 중견학자 중에도 선생을 모르는 이가 더 많을 것이다. 이곳에 올릴만한 선생의 사진을 얻어 볼까 해서 인터넷을 뒤졌지만 엉뚱한 동명이인들만 검색될 뿐 선생은 이미 잊힌 인물이었다. 인생무상을 새삼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뒤늦게 선생의 편린을 후세에 전하는 변변찮은 글을 남김으로써 조금이나마 학은에 보답하고 탄신 백 주년을 그냥 지나친 서운함을 달래보고자 한다.
선생의 자세한 이력은 아래 첨부한 연보에 맡기고 이곳에서는 큰 줄기만 간추리기로 한다. 선생은 1919년 청주에서 출생하여 2006년 캐나다에서 작고하셨으니 그 세대 분으로서는 비교적 장수하신 편이다. 선생은 경성사범 졸업 후 잠시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시다 경성제대 예과(일본의 고등학교에 해당)에 입학하셨고 이어서 경성제대로 진입하셨으나 졸업은 해방 후 경성제대 후신인 경성대학에서 하셨다. 8.15해방과 6.25동란의 혼란 중에 잠시 휘문중학교와 청주고등학교에서 가르치기도 하신 선생은 모든 수준의 교육기관에서 교편을 잡은 희귀한 경력의 소유자이시다. 경북대를 거쳐 서울대로 오신 것은 1958년의 일로 그 과정에서 김증한 선생의 도움이 컸다는 소문이다. 같은 시기에 부임하신 곽윤직 선생과는 평생 가깝게 지내셨는데 사실 두 분은 성격적으로 비슷한 점이 많다. 당시 상법분야는 동년배인 서돈각 선생이 학내에서는 물론이고 학계에서도 이미 확고한 위치를 굳히고 계셨다. 그러나 서돈각 선생은 1972년 법대학장을 마치신 후 바로 동국대 총장으로 나가셨기 때문에 그 후 서울대 상법은 거의 선생의 독무대가 되었다. 1985년 정년퇴임 후에는 잠시 한양대에서 가르치셨으나 바로 캐나다로 이민을 가시는 바람에 유감스럽게도 선생의 학문활동은 그것으로 멈추게 되었다.
오래 동안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내다 보니 학계만 보더라도 선생과 가까운 분들은 많았다. 나와 비슷한 연배로는 권기범 교수나 오수근 교수가 특별히 가까웠다. 두 분으로부터는 몰랐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이 자리를 빌려 감사의 뜻을 표한다. 이처럼 선생과의 친밀도만 놓고 보면 나는 이런 글을 쓸 만한 자격이 모자란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나는 선생과 특별한 인연이 있다. 서울대에서 선생이 퇴직한 자리를 물려받은 사람이 바로 나다. 이를테면 학문세계의 이어달리기에서 나는 선생으로부터 바톤을 물려받은 후행주자인 셈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인연의 전부는 아니다. 선생과의 인연은 1974년 2학기 상법총론 강의실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다음 학기에는 선생으로부터 회사법도 들었다. 강의내용은 기억에 없지만 그저 옅은 미소를 띠며 끝없이 말씀을 이어가시던 모습만 떠오른다. 오히려 강의 중 여담으로 던지신 말씀이 몇 생각난다. 교재로 당신의 책을 소개하시며 좀 더 쉬운 걸 원하면 서돈각 선생의 책을 보라고 하셨던 말씀이나 법학은 천재가 할 만한 학문이 아니고 천재는 문학 같은 것을 해야 한다든가 자신은 학부시절 민법을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성적을 받았다고 하신 말씀이 어렴풋이 기억에 남아있다.
선생과의 보다 깊은 인연은 4학년 1학기 상법연습 시간에 시작되었다. 그 과목은 학생들의 발표로 진행되었는데 공교롭게 내가 첫 번째 발표를 맡게 되었다. 당시 내게 주어진 테마는 상법총칙상의 ‘개업준비행위’에 관한 것이었다. 여러 사람들 앞에서 발표하는 것은 생전 처음이라 몹시 긴장이 되었다. 전에 공부해 두었던 일본어 지식을 동원해서 일본 상법 책까지 참조해서 준비한 발표를 마치자 깐깐하신 분으로만 보였던 선생께서 잘했다고 칭찬을 해주셨다. 교수로부터 칭찬을 들은 일도 처음이었던지라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자연히 선생에 대한 친근감도 더 깊어졌고, 설날에 댁으로 세배를 가기에 이르렀다. 그 때 한복 차림으로 바둑을 두시며 우리를 맞아주시던 인자한 모습이 아직 생생하다.
이 대목에서 잠깐 사모님 이야기를 곁들이기로 하자. 당시 사모님도 한복 차림으로 다과를 대접해주셨는데 실례지만 어린 눈에도 퍽 고운 분으로 보였다. 사모님은 선생이 첫 번째 사모님이 돌아가신 후 재혼으로 맞이하신 분이셨는데 학생들 사이에는 선생의 첫 사랑이었다는 소문이 있었다. 무슨 까닭인지 혼인에까지 이르지는 못하고 두 분이 따로 다른 분과 가정을 꾸리게 되었는데 각자 배우자를 여의고 재결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만해도 소설 같은 이야기인데 며칠 전 외우(畏友) 권기범 교수에게 들은 바로는 처음 사모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그 분과의 재혼을 권하셨다고 한다. 사모님을 다시 뵌 것은 선생 댁을 찾던 때로부터 무려 30년이 지난 2007년의 일이다. 사모님과는 그 때 처음으로 대화다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사모님께서는 교양이 있으면서도 솔직한 성품이셔서 아마 여쭤보았으면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을 텐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사모님께서 2000년대 말 친정 집안 일로 서울에 오셨을 때 내 차로 시내 숙소로 모셔다드린 것이 사모님과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연세로 미루어보면 지금쯤은 작고하셨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주위에 물어도 아는 분이 없다. 내친 김에 첫 사모님 이야기도 한마디 전한다. 사모님은 건강이 좋지 않으신 분이었다. 1963년 선생이 독일 유학을 가실 때에도 사모님은 동행하지 못하셨고 병환 때문에 선생께서 중도에 귀국하셨다고 한다. 결국 1960년대 중반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나로서는 당연히 뵌 적이 없다. 오수근 교수의 말에 따르면 옛 제자들 중에는 자신들을 따뜻이 대해주셨던 첫 사모님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분들이 많다고 한다. 첫 사모님과의 사이에는 소생이 없었기 때문에 선생은 형님의 아들을 양자로 삼았다.
선생의 강의는 대학원에서도 들었다. 1977년 1학기 수업은 Strohmanngründung bei Kapitalgesellschaften이란 책의 제1장을 복사하여 강독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독일어가 서툴렀던 나는 낑낑대고 있는데 당시 법학연구소 조교였던 최병조 선배는 술술 읽어내서 부러웠다. 선생께선 “자네는 독일어를 나보다도 더 잘하는 것 같다”라고 칭찬하셨던 기억이 생생하다. 당시 대학원 논문지도교수는 송상현 선생이셨다. 그런데 1978년 여름 하바드로 연구년을 떠나시는 바람에 석사논문을 제출할 때는 지도교수를 바꿔야했다. 논문주제는 Class Action으로 민사소송법이었지만 선생께서 흔쾌히 지도교수가 되어주셨고 유학 갈 때 추천서까지 써주셨다. 미국의 law review에 발표한 석사논문의 별쇄본을 자랑삼아 선생께 건네 드렸더니 활짝 웃으시며 칭찬해주셨다.
이제부터는 감히 선생에 대한 인물평을 섞어가며 선생을 회상해보기로 한다. 선생은 전형적인 수재형 학자로 자존심이 강한 분이었다. 직접 확인은 못했지만 경성제대 예과에 입학할 때에는 전체 수석으로 선서를 했다고 한다. 선생은 일본식 고등학교와 제국대학의 엘리트교육을 거친 최후 세대에 속한다. 상법전공이면서도 일찍이 Coing의 법철학이나 Radbruch의 법학입문 책을 번역한 것도 학문적 관심의 폭이 넓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아닌가 생각된다.
제자로서 실례되는 표현이지만 선생은 천진난만한 아이 같은 측면이 있었다. 애써 겸손하려 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허세나 가식을 부리는 일도 없었다. 이런 건방진 글을 마음 놓고 쓸 수 있는 것도 선생이 하늘에서 보시더라도 노여워하지 않으실 것 같기 때문이다. 어느 해 세배 자리에서 선생이 얼마 전 일본정부초청으로 대학시찰을 다녀왔는데 일본 교수들을 만나서 학문적 대화를 나누느라 귀찮았다고 솔직히 말씀하셔서 당황했던 일이 있다. 아들 벌인 제자들 앞에서도 거침없이 본심을 털어놓는 교수는 아마 지금도 별로 없을 것이다. 선생의 천진스런 구석은 바둑을 둘 때도 드러났다. 대학원 시절 하루는 선생이 시간이 되었는데도 나타나지 않아 교수휴게실에 가보니 바둑 삼매경에 빠져 계셨다. 강의시간이라고 말씀드리기도 멋쩍어 머뭇머뭇하다가 모두 그냥 귀가해버린 일도 있었다. 선생은 경제학부 정병휴 선생과도 친했는데 소문에 의하면 하루는 연구실에서 두 분이 바둑을 두시느라 밤을 꼬박 새우신 일도 있다는 것이다. 선생의 바둑상대이기도 했던 권기범 교수에 의하면 선생은 5급 정도의 실력으로 호승심(好勝心)이 무척 강했다고 한다. 한번 두기 시작하면 좀처럼 일어서지 않고 특히 지는 경우에는 계속 더 둘 것을 고집해서 난처한 적이 많았다는 것이다. 선생은 넉 점을 깔고 두기도 했는데 패하면 치수를 고쳐야하는 상황에 몰리게 되면 “이번이 카도반(角番: 일본말로 막판이란 의미)인데”라는 말을 되뇌며 안절부절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초기 제자들 일부는 선생을 전혀 다른 모습으로 기억하고 있는 것이 흥미롭다. 부임 초 선생은 “독사”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는데 이는 선생이 워낙 날카롭고 차갑게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같은 사람도 보는 이에 따라 전혀 다르게 느껴지는 경우가 종종 있기는 하지만 적어도 내가 뵐 무렵에는 “독사” 같은 면모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더 부드러워지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로서는 선생이 내 선친과 거의 같은 연배시다보니 마치 아버지를 대하는 듯한 느낌을 가졌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1985년 일시 귀국했을 때 한양대로 선생을 뵈러 간 일이 있다. 반년 전 돌아가신 선친이 오래 병으로 고생하셨는데 제대로 모시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린다고 말씀드렸더니 “장병(長病)에 효자 없다”는 말로 마음을 녹여주시기도 했다. 서울대에서 30년 가까이 선배로 모셨던 호문혁 선생한테 들은 이야기도 선생의 따뜻한 인품을 보여준다. 1970년대 후반 호선생이 영남대에 취직이 정해질 무렵 주위에선 그래도 서울대에서 누가 한번 ‘청탁차’ 예방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걱정을 하자 선생께선 바로 “그럼 내 차로 한번 같이 가보자”고 선뜻 말씀하셨다고 한다. 결국 그럴 필요까진 없게 되어 대구행 드라이브는 무산되고 말았다는데 30여 년 전에 들은 그 미담은 아직도 나를 뭉클하게 만든다.
선생과 같은 수재형 인간은 아무래도 맺고 끊는 것이 단호한 성벽을 동반하는 사례가 많은 것 같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선생의 그런 성품과 관련이 있다. 학자들이 다 조금은 그렇지만 선생도 자신 같은 수재를 편애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 대상 중 한분이 송상현선생이었다. 선생은 송선생을 무척 아꼈다. 물론 송선생도 선생을 깍듯이 모셨다. 그런데 이런 두 분 사이가 틀어지는 일이 생기게 되었다. 그 계기가 된 것은 선생의 후임 자리를 둘러싼 인사문제였다. 이 거북하고 미묘한 이야기를 여기서 미주알고주알 늘어놓을 생각은 없다. 거두절미하자면 결국 선생은 그 인사와 관련하여 당신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선생은 그것이 송선생 탓이라고 생각하고 배신감을 느꼈다. 그 일 이후 두 분의 관계는 영영 회복하지 못하고 틀어지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선생의 의사가 관철되지 못한 바람에 들어오게 된 사람이 바로 나다. 새파란 나이에 모교 교수가 된 것은 내게 과분한 영광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가장 존경하는 두 분이 나 때문에 사이가 어긋나게 된 것은 너무 괴로웠다. 그 불편함은 시간이 흐르면서 수그러들기는 했지만 내내 사라지지는 않았다. 내가 과연 이 분들의 인연을 단절시킬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인가라는 물음이 때때로 나를 괴롭혔다. 선생을 마치 아버지처럼 받들어왔는데 막판에 갑자기 배신자처럼 몰려 인연을 끊게 된 송선생이 느낀 참담함은 내게 비할 바가 아니었을 것이다. 모든 면에서 완벽하고자 했던 송선생에게는 아마도 일종의 트라우마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송선생과는 계속 가까이 지내왔지만 둘이서 이 일에 대한 이야기를 제대로 나눈 일은 없다. 송선생이 정선생에 대해서 스치듯 언급하는 일은 몇 차례 있었지만, 기록을 위해 구태여 밝혀두거니와, 정선생의 실력과 인품에 대한 송선생의 존경심에는 늘 변함이 없었다.
이 일 때문에 선생이 퇴직 후 캐나다로 이민을 가신 것은 아니겠지만 떠나는 선생의 심사가 착잡하셨을 것만은 분명하다. 캐나다 이민은 그곳에 거주하는 아들과 함께 살고 싶어 하는 사모님의 의사가 주된 원인이었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잠깐 선생의 부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학부시절 동료들 사이에서는 선생의 부친이 유명한 정지용 시인이라는 그럴듯한 소문이 퍼져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었다. 선생의 부친은 정열모라는 홍익대학 초대학장을 역임한 국문학자로 6.25. 동란 중 월북하여 북에서 김일성대학 국문과 교수로 일하면서 사전편찬 작업도 주도한 주요 인사였다고 한다. (이 사실을 알려준 서울대 정긍식 교수께 감사한다.) 남북이 대치중인 우리나라에서 부친이 북에서 저명인사라는 사실은 선생의 입지를 좁히는 요인이었을 것이다. 선생께서 캐나다 이민을 결심하신 데는 생이별한 부친을 만나보고자 하는 바람도 다소 작용을 했다고 한다. 캐나다에서 수소문해보니 부친은 이미 작고한 상태였고 북에서 출생한 이복동생과 연락이 되어 다소 도움을 줄 수 있었다는 후문이다.
선생이 캐나다로 떠나신 후 내가 선생을 뵌 것은 두 차례 뿐이다. 한번은 상사법학회 모임에 오셔서 간단히 인사말을 하셨다. 당시 “이제 나는 이미 폐물이 된 사람이다”라고 하셨던 말씀이 너무도 인상적이었다. 두 번째는 시내 호텔에서 역시 상사법학회 원로회원들 틈에 끼어서 잠시 뵐 수 있었다. 그 때는 이미 거동이 상당히 불편한 상태셨는데 정신만은 총총하신 것 같았다. 곁에 앉은 서돈각 선생을 향해 “자네”라고 “하게체”로 말씀하신 것이 내게는 신기하게 들렸다. 그 만남에서 느끼기에는 이미 선생의 서운한 감정은 거의 사라진 것 같아서 한결 마음이 놓였다.
2004년 선생의 정년 20주년을 기념해서 “상법연구의 향기”라는 논문집을 출간할 때에는 나도 “내부자거래와 내부정보의 이용”이란 글을 기고했다. 이 논문집은 양승규 선생께서 오수근 교수의 도움을 받아 주도하신 것으로 기억한다. 평생 선생을 정성껏 모셨던 양선생이 이미 생이 얼마 남지 않은 정선생을 위로하기 위해서 기획한 마지막 프로젝트였다. 선생은 과연 그 후 머지않아 작고하셨고 작고하신 1년 후에는 서울대에서 사모님을 모시고 조촐한 추도식을 가졌다. 이 자리에는 와병 중이시던 곽윤직 선생도 휠체어를 타고 참석해 먼저 간 옛 동료를 기려주셨다.
이 짧은 글을 쓰면서 취재(?)를 핑계로 권기범 교수와 만나 점심을 같이 하며 담소를 나눴다. 권교수를 통해서 비로소 선생이 캐나다에 가신 후에도 서울에 여러 차례 오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권교수와 바둑을 두시며 “내가 퇴직금을 일시불로 받지 않고 연금으로 받았으면 서울에서 살 수 있을 텐데”라고 후회하셨다는 말을 듣고 짠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선생은 김증한, 곽윤직 선생 외에 법대 밖에서는 사회학과 이만갑, 국사학과 한우근, 경제학부 정병휴, 외교학과 동덕모 선생 등과 가까웠다. 지금은 이분들도 하나같이 저 세상에 계시다. 바둑판이라도 앞에 놓고 웃음꽃을 피우고 계시려나? 봄 같지 않은 봄을 맞아 백발 성성한 머리 숙여 옛 은사의 명복을 빌어본다. (2020.3.15.)(2022.11.22. 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