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처음 맡은 강의는 상법총론, 즉 상법전의 총칙과 상행위편을 가르치는 과목이었다. 신참교수가 대개 다 그렇듯이 강의준비에 애를 먹었다. 유학시절에는 물론이고 학부시절에도 제대로 공부해본 적이 없는 내용이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자습하여 가르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어려움은 다른 곳에 있었다. 총칙과 상행위의 법조항 자체가 체계적이지 못하고 “단편화”된 상태이기 때문에 이론적으로나 실무적으로 의미있는 내용의 강의를 하기가 어려웠다. 그런 고역을 20년 정도 치렀지만 지난 세월에 대한 아쉬움보다는 그 강의를 들은 학생들에 대한 미안함이 더 크다. 최근 특히 일본에서 空洞化하고 있는 상법전의 장래를 두고 논의가 비교적 활발한데(대표적으로 法学敎室 499호(2022)에서 509호(20023)까지 연재된 시리즈. 특히 그 중에서도 499호의 토쿠츠(得律晶)교수의 글(형식적의의의 상법과 상법의 적용범위 45-52면)이 유익하다) 이제 다행히 상법총론의 질곡에서 풀려난 처지임에도 습관적으로 눈길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오늘은 비슷한 문제의식에서 쓰여진 미국학자의 최신 논문을 소개하기로 한다. Steven L. Schwarcz, Rethinking Commercial Law’s Uncertain Boundaries, 14 HARVARD BUSINESS LAW REVIEW (Fall 2023) 저자인 Schwarcz교수는 이제 이 블로그 독자라면 친숙할 상법의 대가이다.
논문은 서론과 결론을 제외하면 4개의 장으로 구성된다. I장에서는 commercial law, 즉 상법의 경계가 불분명하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자신의 주장을 UCC를 중심으로 제시한다. II장에서는 그 경계가 불분명한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가설로 다음 다섯 가지를 상정한다. ①은 상법의 발전이 경로의존적이고 그때그때의 필요에 따라 이루어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가설은 특히 상법의 기초를 이루는 이른바 lex mercatoria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데 저자는 lex mercatoria의 성격과 내용에 대해서 다양한 견해가 존재함을 지적한다. ②상법이 상거래의 진보와 효율을 증진하고 거래자들 사이의 협동을 유도하는 것과 같은 광범하면서도 모호하게 정의된 사명을 추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③상법이 임의로 非상업적 중개인을 규율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④상법이 경제계를 위해서 무제한의 입법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⑤상법이 잘 정의된 규범적 목적을 결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III장에서 저자는 상법의 경계를 명확히 구획하기 위한 방안을 제시한다. 저자는 특히 위 ⑤에 주목하여 상법의 경계를 확정하기 위해서는 먼저 상법의 목적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상법의 목적을 상거래의 촉진이라고 본다. 저자는 상거래를 당사자들이 재산의 양도나 서비스의 공급을 통해서 가치의 극대화를 시도하는 사업상의(business-related) 거래라고 정의하며 사업상의 재산양도에 초점을 맞춘다. 흥미로운 것은 저자는 사업성의 한 요소로 “상인”(merchant)개념을 채택한다는 것이다.
IV장에서는 III장에서 밝힌 견해에 비추어 현실의 UCC를 평가한다. 저자에 따르면 UCC는 상품의 매매(sale of goods)의 경우에는 非사업적 거래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자신의 견해보다 광범하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저자는 사업적 매매의 경우에는 상품이 아닌 재산이 목적인 경우에도 상법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보는데 반하여 UCC는 상품의 매매에 대해서만 적용이 된다는 점에서 적용범위가 협소하다고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