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츠타 미사오(龍田節) 선생의 추억

지난 2월 동경에서 만난 에가시라(江頭憲治郎) 교수로부터 원로 상법학자인 타츠타 미사오(龍田節) 선생이 작년 4월 작고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오래동안 흠모하던 분으로 너무 늦기 전에 한번 문안을 드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이따금 떠올렸던 터라 아쉬움이 컸다. 갑자기 돌아가신 것이냐 묻자 바로 전까지 学士院(우리 학술원에 해당)에서 발표까지 할 정도로 정정했다는 것이다. 뒤늦게라도 선생과의 변변찮은 인연이나마 돌이켜봄으로써 허전함을 달래보고자 한다.

선생은 1933년 9월 코베에서 태어나 2022년 4월 별세하였으니 만88세를 산 셈이다. 교토(京都)대학에서 저명한 상법학자인 오오스미 켄이치로(大隅健一郎) 교수의 문하생으로 지도를 받았다. 1956년 대학졸업 후에는 조수를 거쳐 1958년 전임강사로 채용되어 줄곧 교토대학에 재직하였으니 그야말로 엘리트코스를 밟았다고 할 수 있다. 정년퇴직 후에는 코베학원(神戸学院)대학과 토시샤(同志社)대학에서 강의를 계속하였다.

내가 “타츠타”란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은 1980년대 초 워싱턴대에서 유학하던 시절의 일이다. 당시 내 지도교수였던 Dan Fenno Henderson교수는 1세대 일본법 전문가였는데 그가 1970년대에 만든 미국과 일본의 비교회사법에 관한 두툼한 프린트물 교재의 일본측 공저자가 바로 선생이었다. 그때만 해도 타츠타가 漢字로 龍田이란 사실도 알지 못했다. 유학 전 대학원 시절에는 민사소송법을 전공했던 관계로 미카즈키 아키라(三ヶ月章), 신도 코우지(新堂幸司), 타니구치 야스헤이(谷口安平) 같은 민소교수들의 글은 읽어 보았지만 상법학자들의 글은 (전에 소개한 바 있는 타케우치(竹內昭夫) 교수(2020.4.5.자)를 제외하면) 거의 접한 일이 없었다. Henderson교수에게는 특별히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없다. 그런데 내가 존경하고 따랐던 회사법과 세법 전공의 Kummert교수는 선생을 간혹 언급했고 매우 높이 평가했다. 꼼꼼하고 깐깐하기 짝이 없는 Kummert교수는 1985년 무렵 Henderson교수 대신 그 교재를 개정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선생을 입에 올릴 때면 표정이 밝아지곤 했다.

선생에 대해서 좀 더 알게 된 것은 귀국 후 상법강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했을 무렵의 일이다. 오래전부터 일본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일본문헌을 많이 참조했는데 그 과정에서 선생의 이름을 종종 접하게 되었다. 특히 선생이 타케우치 교수와 함께 편집한 “현대기업법강좌”나 “판례교재 회사법” 등은 잊을 수 없다. 뜻밖에도 선생의 존재가 한층 더 가깝게 다가온 것은 1990년 독일 뮌헨에서 공부할 때였다. 당시 나를 초청한 연구소 소장인 Klaus Hopt교수는 스위스 베른대학에서 뮌헨대학으로 전직하기 직전에 교토대학에서 잠시 가르친 바 있다. 확인해 보진 않았지만 아마도 그때 Hopt교수를 교토로 초청했던 분이 타츠타 선생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국제적으로 명성 높은 상법학자인 Hopt교수는 매우 명석하면서도 부지런한 분인데 이 분도 선생을 높이 평가했다. 마침 당시 뮌헨에는 교토대학에서 온 방문학자가 두 사람이나 있었다. 이들 상법의 스자키(洲崎博史) 교수와 민법의 야마모토(山本敬三) 교수와는 친하게 지냈는데 특히 스자키 교수는 전공 뿐 아니라 소속 연구소도 같아서 그에게 교토대학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독일에서 귀국 후 얼마 지나지 않은 90년대 초 그들도 만날 겸 쿄토대학을 방문했다. 스자키교수의 안내를 받아 드디어 타츠타 선생의 연구실 문을 두드렸다. 연구실 문을 들어서니 선생은 마침 양치를 하고 있어 잠시 서로 조금 어색했다. 그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선생이 약간 거리를 두고 사무적으로 대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수년 전 동경대학에서 타케우치교수의 연구실을 찾았을 때 반기던 모습과는 대조적이었다. 길지 않은 만남이었지만 그래도 몇 가지 대화는 아직도 생생하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자신의 문장에 관한 이야기였다. 선생의 문장은 매끄럽고 깔끔하면서도 흔히 접하는 법률문장과는 달리 개성이 물씬 풍기는 口語體 표현이 많았다. 또한 무엇보다도 두드러진 특징은 단문(短文)을 즐겨 쓴다는 것이었다. 내가 공부하던 미국 로스쿨에서도 늘 짧은 문장을 쓸 것을 강조했는데 한국에서는 그런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조심스럽게 어떻게 단문을 즐겨 쓰게 되었는지를 묻자 딱딱한 표정이 금방 누그러지는 것 같았다. 선생은 그 이유를 밝히지는 않았으나 대신 자신은 과거 20칸×20칸의 4백자 원고지에 글을 쓸 때 한 문장이 한 줄을 넘지 않도록 의식적으로 애썼다고 말했다. 그런데 나중에 컴퓨터를 사용하다 보니 한 줄에 들어가는 글자 수가 늘어나 문장도 길어지게 되었다고 털어놓았다. 그 밖에 자신의 학생 시절 옛날 책을 보면 여백에 세필(細筆)로 적은 작은 글씨의 코멘트가 여기저기 적혀있었다는 회고담도 웬일인지 기억에 남아있다.

선생과의 면담을 마치고 선생의 제자인 마에다(前田雅弘) 교수의 연구실도 방문했다. 마찬가지로 모범생의 면모를 지녔으나 자신의 스승보다는 부드러운 인상의 소유자였다. 그 후에는 스자키와 야마모토, 두 교수와 함께 학교 근처 커피샵에서 커피를 마시며 한가로이 잡담을 나눴는데 그때도 선생이 화제에 올랐다. 선생은 미국 로스쿨에서와 같이 강의를 문답식으로 진행했는데(이른바 Socratic method) 강의 중 학생들 사이에 마이크가 오갈 때 학생들은 마이크를 마치 폭탄인 것처럼 두려워했다고 한다. 또 선생은 딸이 대학에 들어간 후에는 학생들에 대한 엄격성이 눈에 띄게 완화되었는데 그 이유를 놓고 학생들이 수군댔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 만남이 있고 머지 않아 이번에는 서울에서 선생을 만날 기회가 생겼다. 아마도 1993년이나 1994년의 일이라고 여겨지는데 선생이 국제거래법학회의 초청으로 방한하였다. 당시에도 나는 국제거래법학회 일에는 깊이 관여하지 않았지만 선생이 상법학자이고 강연주제가 “증권거래법의 역외적용”(나중에 국제거래법연구 제3집(1994)에 수록)이었기 때문에 학회쪽에서는 내게 통역과 번역을 부탁했다. 부부동반으로 방한하는 선생을 맞으러 집사람과 함께 김포공항으로 나갔다. 그런데 도착장 출구에서 나오는 선생의 모습은 연구실에서 보았던 것과는 너무도 딴판이었다. 비행기에서 맥주라도 한잔 걸친 듯 불콰하면서도 느긋한 얼굴은 엄숙한 학자보다는 맘씨 좋은 관광객에 가까웠다. 수년 전 서울을 찾았을 때 택시기사에게 바가지를 쓴 일이 있었다며 공항까지 나와준 것에 감사를 표시했다. 마침 저녁 시간이라 두분을 지금은 없어진 대치동 우래옥으로 모셨다. 이분들은 시장했는지 한 그릇 가득한 물냉면을 단숨에 해치웠다. 내게 그릇을 들고 국물을 마셔도 되는지 묻기에 괜찮다고 하니 국물까지 맛있게 들이키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지난 번 방문했을 때 서울대 캠퍼스를 보고 싶어 지하철을 타고 서울대 입구역에서 내렸는데 아무리 걸어도 학교가 나오지 않아 고생했다는 실패담을 털어놓기도 했다.

그 후에는 선생과 장시간의 만남을 가진 적이 없다. 언젠가 스자키교수를 만났을 때 그의 근황을 물었더니 이제 정년을 앞두고 있어서 그런지 교수회의도 빼먹고 낚시를 가는 등 유유자적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선생을 최후로 대면한 것은 정확한 기억인지 자신 없지만 아마도 2000년대초 동경의 어느 대학에서 열렸던 일본 사법(私法)학회 때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학술대회 중간의 휴게시간에 바깥 공기도 쐴 겸 마당으로 나왔더니 마침 선생이 한구석에서 혼자 담배를 피고 있었다. 왠지 쓸쓸한 분위기를 풍기는 그에게 다가가 인사를 드렸더니 몹시 반가워했다. 화제가 우리 두 사람의 공통의 친구인 Hopt교수에 미치자 그로부터 티벳을 여행 중이란 엽서를 받았다며 그의 도전적인 자세를 부러워했다. 당시에는 이미 교토를 떠나 코베에서 가르치고 있었는데 선생과 헤어지며 그것이 마지막 만남이란 생각은 못했다. 코베로 한번 찾아뵙겠다는 인사를 한 것 같기도 한데 어쩌면 마음속으로만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상이 선생과 나의 얄팍한 인연의 전부이다. 선생은 글도 외모나 행동거지도 그야말로 머리 좋은 수재의 전형에 속한다. 수재형 인물이 흔히 그렇듯이 사람을 너무 능력위주로 평가하고 대인관계가 빡빡한 면이 없지 않았던 것 같다. 이곳 저곳에서 들은 바에 따르면 선생은 발표나 답변이 시원치 않은 경우에는 학생들에게는 물론이고 기성학자들에게도 이마 옆 핏줄을 꿈틀거리며 화를 내곤 했다고 한다. 동향으로 전공이 같을 뿐 아니라 학사원에서도 같이 활동한 에가시라 교수의 말로는 선생은 자신의 능력이 평범하다고 믿고 자기 기준에 미치지 못한 사람은 게으른 것으로 치부했다고 한다. 지난번 블로그에서도 지적했지만 선생은 예리하고 명쾌한 논리를 구사하고 자유로운 문체의 단문을 즐겼다는 점에서 자신과 일생 협력관계를 유지했던 타케우치교수와 비슷한 면이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지난 2월 동경에서 만난 동경대학 후지타(藤田友敬)교수도 만찬 자리에서 내게 똑같은 말을 했다. 그는 자신이 학생 때 같은 말을 자신의 지도교수인 에가시라교수에게 했더니 에가시라교수가 단박에 두 분의 차이를 한마디로 집어내는 바람에 놀랐다고 말했다. 에가시라교수의 그 발언도 흥미로웠지만 私的인 내용이라 그냥 넘어가기로 한다.

이 글을 쓰느라 인터넷을 검색하는 과정에서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선생은 원래 문학부를 지망했었는데 “경제학부쪽이 망해도 쓸모가 있다”는 부친의 말을 듣고 중간을 택해서 법학부로 진학했다는 소문이 있다. 그러고 보니 선생의 문장이 유려한 것은 문학부 취향이 발휘된 탓인지도 모르겠다. 또한 딸의 대학진학 후 태도가 누그러졌다는 앞의 평가와는 상반되는 증언도 있다. 도시샤대학시절의 제자가 선생의 별세 소식을 듣고 올려놓은 글에 따르면 자기가 강의를 들을 때도 선생은 문답식을 고수했는데 다만 사전에 5, 6명 정도의 학생들을 발표자로 지정하고 몇 개의 질문을 배정하는 식으로 진행했다고 한다. 자신도 배정받은 질문에 답하기 위해 기본서를 여러 권 읽었지만 이해를 못해서 제대로 답을 못하자 선생이 화를 내는 바람에 곤욕을 치렀다는 것이다. 한편 대학원에서 발표를 준비할 때 美英獨佛의 관련 조문과 제도를 꼼꼼히 조사하라는 지시에 따르느라 고생했다는 회고담도 있다. 이처럼 비교법을 중시하는 태도는 일본 대학원교육의 특징인 동시에 특히 타츠타 선생 세대의 학자들에게 두드러진 경향이기도 하다. 스자키교수에 의하면 선생은 과거 美英獨佛의 문헌은 물론이고 심지어 이태리 문헌까지 인용하며 발군의 어학력을 과시했다고 한다. 요즘도 비교법은 여전히 중요하지만 일본법학의 수준이 높아지고 국내 논의도 풍부해진 탓인지 과거보다는 외국문헌에 대한 의존도가 줄어든 것 같은 느낌이다.

선생을 추모하기 위하여 쓰기 시작한 글이니 끝으로 그의 온화한 면모에 대한 일화를 소개하며 마치기로 한다. 앞서 언급한 대학원 제자가 논문작성을 위해서 도서관에서 외국문헌을 여러 권 빌려 낑낑대며 복사실로 가는 도중 선생을 만났는데 선생이 잔뜩 쌓인 원서를 보고 미소지으며 “열심히 하게”라고 격려해주었다는 것이다. 그는 열심히 연구하는 한 친절한 선생이었다고 회상하며 명복을 빌었다. 살다 보면 같은 사람에 대한 인상이나 평가가 각자의 체험에 따라 크게 차이 나는 경우를 흔히 접하게 된다. 실은 같은 사람도 기분이나 상황에 따라 다른 사람처럼 행동하는 일도 적지 않다. 선생에 대한 엇갈린 평가도 그런 요인이 작용한 측면이 없지 않을 것이다. 전혀 다른 이야기이지만 이 에피소드를 읽으며 학생들에게 따뜻한 격려의 말을 건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실감했다. 이미 교직을 떠난 내게 그런 각성은 만시지탄의 감이 있지만 아직 젊은 학생들을 대할 세월이 많이 남은 후배교수들에게는 참고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또 이 글을 쓰면서 문득 “나는 과연 학생들 눈에 어떻게 비쳤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으면 옛 제자들은 어떤 생각을 떠올릴까? 오랜 세월 우월적 지위에 기대어 어린 학생들이나 심지어 젊은 학자들에게까지 부지불식간에 내뱉은 숱한 가시 돋은 직설들을 이제 와서 주워 담을 도리는 없다. 그냥 따사한 봄날 오후의 나른함에 취해 빠져본 부질없는 한 자락 몽상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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