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법 특히 그 중에서도 기업지배구조의 연구는 인접학문의 이해를 필요로 한다. 인접학문의 공부는 즐거움도 주지만 동시에 괴로움을 수반하기도 하는 것이 사실이다. 경제경영분야만 하더라도 법경제학, 산업조직론, 경제발전론, 경제사, 재무관리, 회계학 등 알아야할 것은 끝이 없다. 나아가 역사, 정치, 사회, 심리와의 관계에까지 이르게 되면 절망적인 심정이 들기도 한다. 그래도 아직 정치, 경제, 역사 등에 관한 거대담론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떨쳐버리지는 못한 상태이다. 기업지배구조는 전통적인 법적 연구테마에 비하면 거창하면서도 유동적인 분야이지만 그래도 학술지 발표를 의식하다 보면 미시적인 분석에 치중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 우연히 집어든 거대담론에 관한 책을 읽게 되면 모처럼 바닷바람을 쐬는 듯한 청량감을 얻곤 한다. 그것이 전공연구에도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보다 편한 마음으로 지적 만족을 추구할 수 있을 터이다. 그러나 내 경험상 법학 연구와 지적 쾌락을 동시에 추구하는 것이 가능한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다.
퇴직에 앞서 연구실을 정리하면서도 Albert O. Hirschman, Douglas North, Mancur Olson, Oliver Williamson, Mancur Olson, Alfred Chandler, Charles Kindleberger 같은 경제학자들의 책을 버릴지 말지를 놓고 한동안 고민했다. 가뜩이나 비좁은 서재에 책을 꼽을 공간도 부족하고 솔직히 읽어낼 끈기도 딸리다보니 어지간하면 자비로 구입하기 보다는 유투브에 올려있는 저자의 강연을 듣고 마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어차피 현실적으로 읽지도 못할 바에는 그래도 유투브라도 보는 것이 안 보는 것보다는 낫지 않느냐는 게 내 핑계다. 그런데 오늘 소개하는 Acemoglu와 Robinson이 공저한 신간은 과연 이런 비겁한 편법을 고수할 것인지 여부를 고민하게 만드는 책이다. 이들이 공저한 “Why Nations Fail”(2012)이란 책은 Francis Fukuyama나 Niall Ferguson 같은 세계적 명사들의 책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렸다. 경제성장에서 – 우리말로 번역이 어려운 – “institution”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논증한 이 책은 나도 모처럼 공감을 느끼며 끝까지 읽었다. 특히 Acemoglu는 칭찬에 인색한 내 주변의 경제학자들도 모두 인정하는 석학이라 더 관심이 갔다.
이 두 사람이 이번에 낸 신간은 자유로운 민주사회가 존립하기 위한 조건을 다루고 있다. 자유를 제대로 누릴 수 있기 위해서는 국가와 사회 사이에 권력의 균형이 적절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논지이다. “좁은 통로”(narrow corridor)라는 제목은 그런 균형에 이르는 길이 매우 좁다는 점을 시사한다. 솔직히 지금 이 책에 대해서 내가 아는 것이라곤 파이낸셜 타임즈에 실린 서평(google에서 책 제목을 치면 구할 수 있다)을 읽은 것 밖에 없다. 그 서평은 짧으면서도 책에 관한 흥미로운 정보를 많이 담고 있는데 특히 다음 구절을 읽고는 한층 관심이 동하게 되었다. “This book is more original and exciting than its predecessor(Why Nations Fail을 가리킴). It has gone beyond the focus on institutions to one on how a state really works.” 인터넷 교보문고를 가보니 벌써 이 책은 올라와 있었다. 나아가 2012년에 나온 “Why Nations Fail”은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팔리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놀라운 것은 그 번역서의 출간년도가 원저와 같은 2012년이라는 사실이다. 우리 지식사회가 이렇게 기민하게 움직인다는 점이 흐뭇했다. 현재로는 인터넷으로 원서를 주문하는 것, 번역본을 기다리는 것, 유투브를 보는 것의 세 가지 선택지 중에서 어느 쪽을 택할 것인지를 놓고 고민 중이다.
유투브에는 이 책에 관한 동영상이 여럿 존재하는데 다음 동영상이 Acemoglu가 나온 것 중에는 가장 긴 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e1xKUZCf7P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