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의무와 사적자치의 관계에 관한 델라웨어 형평법원의 최신 판례

이사의 신인의무, 특히 충실의무를 사적자치에 의해서 제한할 수 있는지의 문제는 특히 계약설적 회사관이 우세한 미국에서 종종 논의되는 주제이다(김건식/노혁준/천경훈, 회사법 7판 422면; 2020.12.9.자 포스트). 오늘은 마침 델라웨어 형평법원이 최근 그에 관한 판례를 발표한 바 있기에 그것을 소개하기로 한다. New Enterprise Associates 14, L.P., et al v. Rich, et al. C.A. No. 2022-0406-JTL (Del. Ch. May 2, 2023) 본문이 129페이지에 이르는 이 판례에서 법원은 주주가 신인의무위반을 이유로 제소할 권리를 사전에 포기할 수 있는 범위와 한계를 집중적으로 검토하였다. 이하의 소개는 O’Melveny로펌의 뉴스레터를 주로 참고하였다.

1. 사실관계

단순화한 사실관계는 다음과 같다. 원고들은 미공개회사에 투자한 펀드들이고 피고들은 당해회사의 경영을 담당하는 이사 A, B, C이다. 회사의 설립자이자 CEO인 A는 설립직후 원고들로부터 투자를 받았다. 몇년 후 회사가 추가로 자금조달을 시도했으나 원고들이 추가투자를 거부하자 결국 B로부터 신규출자를 받았다. 신규출자의 조건으로 B는 회사의 주요주주들이 의결권계약(voting agreement)에 서명할 것을 요구하였고 원고들은 그에 서명하였다. 그 의결권계약에는 동반매각청구권(drag-along)조항을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에 의하면 서명한 당사자들은 일정한 요건을 충족한 장래의 회사매각에 찬성할 의무가 있고 나아가 그 거래와 관련하여 신인의무위반 등을 이유로 B를 상대로 제소하는 권리는 포기되었다. 이 동반매각청구권은 회사의 이사회와 주식의 과반수를 보유한 주주의 찬성이 있으면 발동되게 되어 있었다.

회사의 매각기회가 찾아오자 회사는 두 가지 조치를 취했다. ①먼저 매수자에게 이전에 기존 투자자들에게 발행한 것과 같은 종류의 주식을 같은 조건으로 대량 발행하였다. ⓶또한 각 이사에게 상당 수의 스톡옵션을 부여하였다. 법원은 이들 조치를 이해관계거래(interested transactions)로 파악하였다. 이후에 회사는 매수자에게 흡수합병되었다. 합병에 대해서는 동반매각청구권의 발동요건을 충족하는 다수의 이사들과 주주들이 찬성했으므로 그에 따라 동반매각청구권을 발동하여 합병을 실행했다. 원고들은 이사들을 상대로 매각이 충실의무위반에 해당한다는 등의 이유로 제소했고 피고들은 제소포기약정을 근거로 그 청구의 각하를 신청했으나 법원은 피고들의 소각하신청을 배척하였다.

2. 법원의 판단

법원은 주주의 사적자치와 지배주주를 포함한 이사의 신인의무가 충돌하는 이 사안에서 州회사법상 주주의 사적자치가 어느 범위까지 인정할 것인가의 문제를 검토하였다. 법원은 주주에게는 상당한 사적자치의 공간이 허용되지만 그것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특히 고의의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를 주장하는 신인의무위반의 경우에는 그러하다고 보았다. 원고주주들이 제소권을 포기하였다는 피고들의 주장을 배척하기 위해서는 원고들이 제소권포기약정이 무효임을 증명해야 했다. 원고들은 신인의무가 형평법의 산물이기 때문에 州회사법이 명시적으로 허용하지 않는 한 그것을 제한할 수 없다는 것을 근거로 그 약정이 무효임을 주장했다. 법원은 신인의무를 계약으로 조정하는 것(fiduciary tailoring)이 州의 제정법이나 판례법상 허용되는지 여부를 검토한 후 그러한 조정이 허용된다고 밝혔다. 문제는 그것이 과연 어느 범위까지 허용되는가이다.

법원은 주식매수청구권의 사전포기를 허용한 州대법원판결(Manti Holdings, LLC v. Authentix Acquisition Co.판결)의 논리에 따라 제소권사전포기약정이 문면상 허용된 범위를 넘지 않았다고 판단하였다. 판단에 고려된 사항은 다음과 같다. ①약정은 전문투자자가 법률가의 도움을 받아 교섭을 거쳐 체결되었다. ⓶원고들은 그 약정이 장차 매각 시에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적용될 수도 있음을 알았다. ⓷원고들도 내부자였으므로 피고들과의 사이에 정보의 비대칭이 존재하지 않았다. ④원고들은 합의시점에 강박을 받은 것이 아니고 싫으면 회사의 자금조달거래를 저지할 수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⑤원고들 중 하나는 전미벤처캐피탈협회(NVCA)의 회원으로 문제의 약정은 협회의 모범계약을 따른 것이었다. 한편 법원은 제소권포기약정에는 서명하지 않는 주주들도 존재하기 때문에 피고들의 신인의무위반에 대해서 책임을 물을 여지가 남아 있다는 점도 고려하였다.

법원은 신인의무위반을 이유로 제소할 권리를 사전포기하는 약정의 효력은 다음 두 가지 요건을 토대로 판단한다고 판시하였다. ①사전포기약정이 구체적인 거래에만 적용되도록 좁게 작성되었는지, ⓶문제의 조항이 합리적인지. 이러한 두 요건을 모두 충족하지 못한 약정은 무효이다. 법원은 일단 사안에서의 제소권포기합의는 문면상 두 요건을 충족하기 때문에 유효라고 보면서도 피고들의 소각하신청을 배척하였다. 법원은 포기합의가 문면상 유효하다고 해도 그 적용이 적절해야 한다는 점을 그 근거로 삼았다. 법원은 제소권의 사전포기는 장래 상대방의 사기나 악의(bad faith)에 기한 “고의적” 불법행위의 책임까지 면제하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법원은 이해관계거래를 비롯하여 원고들이 적시한 사실이 악의의 충실의무위반에 대한 합리적인 추정을 뒷받침할 수도 있다는 판단에서 원고들의 소각하신청을 배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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