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기원 선생과 주현미

35년 넘게 서울대에서 상법을 가르치고 퇴직하신 최기원 선생께서 지난 2일 타계하셨다. 향년 우리 나이로 85세, 하늘을 원망할 수만은 없는 연세이시지만 그래도 선생의 배려로 모교에 취직하여 15년간 각별한 보살핌을 받은 사람으로 아쉬움과 감회가 없을 수 없다. 1960년대 독일에서 회사법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제1세대 학자로 상법 전 분야에 걸쳐 10여권의 체계서를 출간하신 선생의 학문적 업적은 따로 기려야할 것이다. 이곳에서는 선생의 인간적 면모의 일단을 보여주는 몇 조각 사적인 기억을 들춰보며 허전함을 달래기로 한다.

선생과의 인연은 대학원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8년 말 선생이 가까운 제자들을 모아서 공부모임을 만들었는데 어떤 연유에서인지 나도 한몫 끼게 되었다. 한번은 스칸디나비아클럽에서 상대 변형윤 선생을 모셔서 한국경제에 대한 강연을 듣기도 했다. 1979년 유학을 가기 전에는 사모님께서 손수 만드신 요리로 댁에서 환송만찬까지 베풀어주셨다. 선생과의 본격적인 교류는 1986년 9월 유학을 마치고 서울대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시작되었다. 서울대에 부임하는 과정이 마냥 순조롭진 않았는데 그 과정에서 선생께 적지 않은 심려를 끼쳐드렸음은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선생께서는 별 말씀 없이 그저 내가 학교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여러 모로 신경을 써주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선생 눈에 비친 나는 아직 학생 티를 벗지 못한 만31세의 애송이었으니 불안을 느끼셨을 법도 하다. 당시 선생과 나는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았기 때문에 퇴근길에 선생이 모는 차를 얻어 타는 일도 잦았고 점심을 같이 하는 것은 거의 일상사였다. 선생의 단골은 서울대입구역 근처의 설렁탕집 삼미옥과 중국집 대문정이었는데 하루가 멀다 하고 번갈아 들르면서도 다른 식당은 거의 가본 일이 없었다. 사실 선생을 좀 더 잘 알게 된 것은 그 무렵의 일이다.

선생의 첫인상은 딱딱하고 권위주의적일 것 같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런 느낌은 상당부분 선생께서 쓰셨던 두껍고 검은 안경테와 선생의 굳게 다문 입에서 비롯되었던 것 같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선생은 엄하거나 무미건조한 것과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말문이 터지면 속내도 감추지 않고 털어놓으시는 소탈한 분임을 알게 되었다. 선생은 전형적인 서울 토박이로 남에게 신세지기를 꺼리는 깔끔한 성품이셨다. 그렇게 자주 식사를 함께 하면서도 계산은 매번 당신이 맡기를 고집하셨는데 내가 정교수 승진을 한 후 모셨던 자리가 거의 유일한 예외일 정도였다.

워낙 세상물정을 모른 채 교단에 섰던 나로서는 선생을 통해 많은 점을 깨우쳤다. 선생은 평생 유복하게 지내오신 분임에도 인간의 미묘한 심리를 알아채는 감각이 탁월하셨다. 눈치 없이 자기 앞만 보고 지내온 내게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선생의 학자적인 성실성에도 늘 자극을 받았다. 내가 부임할 당시는 선생이 한창 교과서 집필에 온 힘을 쏟으시던 시기였다. 만나기만 하면 시도 때도 없이 크고 작은 쟁점에 관한 자신의 견해와 의문을 털어놓으시는 바람에 당황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강의초년병으로 유학시절 공부한 것과 전혀 동떨어진 과목을 맡아 그저 다음 주 강의노트 준비에 급급하던 시절이었던지라 때론 말씀의 취지를 파악하는 것조차 버거운 경우도 있었다. 지금도 눈에 선한 것은 선생 댁 초인종을 누르면 반바지 차림으로 서재에서 나와 문을 열어주시던 선생의 모습이다.

배우려도 도저히 배울 수 없었던 것은 선생의 예술적인 안목과 식견이었다. 젊은 시절 선생이 어느 오케스트라 첼리스트로 해외연주까지 다녀오신 일이 있다는 이야기는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있는데 직접 확인할 기회는 없었다. 딱 한번 선생의 노래를 직접 들은 일이 있다. 화갑논문 봉정식을 마치고 이어진 만찬자리에서 제자들의 강요에 못 이겨 가곡을 부르셨는데 약간 녹이 슬기는 했지만 훈련을 거친 테너의 소리였다. 나중에 병문안을 갔을 때 여쭤보았더니 역시 젊은 시절 유명 테너로부터 레슨을 받으셨다고 털어놓으셨다.

선생은 미술에 대한 애호도 음악에 뒤지지 않았다. 선생 댁의 벽은 늘 동서양의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과거 선생이 인사동을 자주 출입하셨다는 소문이 제자들 사이에 파다했다. 한번은 선생과 함께 인사동 어느 골동품상을 잠깐 들렀는데 주인이 바로 알아보고 인사를 나누는 것을 직접 목격한 적도 있다.

예술 이야기를 하려면 한이 없지만 한두 가지만 더 하기로 하자. 선생은 서예에 대한 안목도 만만치 않았다. 선생의 환갑기념논문집을 낼 때에는 특별히 당대의 명필로 손꼽혔던 如初 김응현(金鷹顯)씨의 글씨를 받아 장정을 꾸미기도 했다. 사실 내 눈에는 선생의 필체도 범상치 않아 보였다. 선생이 직접 글씨를 쓰는 것을 수차례 곁에서 지켜보기도 했는데 고아(古雅)한 필체가 부러웠다. 분명 어느 대가로부터 사사한 솜씨라고 여겨졌는데 여쭤보지 못한 것이 유감이다.

예술에 대한 선생의 애호는 실로 다방면에 걸친 것이었다. 서울대 부임해서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따뜻한 오후의 일이다. 여느 때처럼 함께 점심을 먹고 나서 서울대 순환도로변 언덕 위에서 잠시 햇빛을 즐기며 담소를 나누었다. 그 때 문득 선생이 느긋한 표정으로 무심코 뱉은 한 마디가 뇌리를 떠나지 않고 남아 있다. “그래도 요즘은 주현미가 제일이지.” 당시 주현미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기는 했다. 그렇지만 그 수많은 대중가수 중에서 주현미의 어떤 면이 클래식에 젖은 선생의 마음을 끌어당겼는지 역시 여쭤보지 못했다. 뒤늦게 알게 된 것은 선생이 새를 무척 좋아하신다는 점이었다. 만년의 선생 댁에는 여기 저기 새 그림이 가득했다. 그러고 보니 혹시 주현미의 간드러진 목청이 새 소리와 비슷해서가 아니었을까하는 상상도 해보게 된다. 선생이 떠나시고 난 마당이라 확인해볼 길은 없지만.

내가 서울대에 부임할 무렵 선생은 갓 50이셨는데 이미 건강이 좋지 않으셨다. 오래 전부터 고혈압이 심했다는 사실은 그 때 비로소 알게 되었다. 잘 아는 종합병원에 선생을 모시고 가서 진찰을 받았는데 담당의사의 말이 충격적이었다. 오랜 고혈압으로 인해서 심장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에 수술을 받아야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는데 정작 당사자인 선생은 오히려 담담한 것 같았다. 결국 선생께서는 방학을 이용해 고교동창인 심장전문의가 있는 독일 뮌헨의 병원에서 수술을 받게 되었다. 이 모든 사실을 주위에는 비밀로 했기 때문에 학교에서도 아는 분이 없었다. 이미 학교 일에는 거리를 두고 지내시던 선생은 그 때부터는 더욱 더 학교 행사를 멀리하게 되었다. 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선생의 이런 방관자적 태도를 마뜩찮게 여기기도 했는데 사실을 털어놓을 수도 없는 나로서는 중간에서 답답했다. 머지않아 선생이 학교 복도에서 쓰러져 뇌수술까지 받으신 후에는 비로소 선생에 대한 오해가 풀리게 되었다.

뇌수술을 받기 전인 1991년의 일 같은데 선생은 심장수술을 받은 후 체크업을 받기 위해서 다시 독일을 방문하신 일이 있다. 마침 당시에는 나도 뮌헨대학에서 체류 중이었기 때문에 선생을 독일에서 뵙게 되었다. 뮌헨에서 선생과 함께 사법의 대가인 Canaris교수를 자택으로 찾아가서 만나기도 했다. 보다 뚜렷한 것은 과거 선생이 유학하셨던 Bonn대학에서 개최했던 세미나에 대한 기억이다. 선생은 독일어 논문을 발표하셨는데 모교에서 당신의 지도교수 후임인 Lutter교수를 비롯한 현지 학자들과 한국에서 온 제자교수들과 함께 참석한 세미나였으니 아마도 감회가 깊으셨을 것이다. 세미나가 끝난 후 제자들과 근처 식당에서 만찬을 같이 했다. 맥주까지 한잔씩 걸친 후에 선생이 한껏 만족스런 표정으로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독일어로 ‘gemütlich’란 말이 바로 지금 이런 기분을 가리키는 말이다.” gemütlich는 사전에 여러 가지 뜻이 적혀 있는데 그날 이후 내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단어가 되었다.

그밖에도 선생과의 기억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언젠가 학교일로 너무 실망한 나머지 포도주 한 병을 들고 선생 댁을 찾은 일이 있다. 한참 불만을 털어놓던 도중에 제풀에 흥분한 나머지 왈칵 눈물을 쏟고 말았다. 선생은 내 울음 섞인 넋두리를 묵묵히 다 받아주며 다독여주셨다. 1996년 선생의 화갑을 맞아 통상적인 기념논문집 대신 상사판례연구 세 권을 만들어 봉정했던 일도 잊을 수 없다. 당시 선생의 애제자인 목영준 헌법재판소 재판관, 김용덕, 권순일, 두 분 대법관과 판례선정을 핑계로 주말마다 목 재판관 집에 모여 중국요리를 시켜먹던 일도 젊은 날의 추억으로 남아 있다.

이런 인연이라면 끝없이 잘 모셔야하는 것이 인간으로서의 도리일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렇게 하지 못했다. 퇴직하신 후 십수 년 동안 선생을 뵙고 말씀을 나눈 것은 거의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이다.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마음 한구석이 늘 편치 않았다. 그런 상태에서 선생을 떠나보내게 되니 실로 만감이 교차한다. 그저 선생께서 새들 지저귀는 따뜻한 하늘나라에서 주현미 노래라도 흥얼거리며 gemütlich하게 지내시기를 기원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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