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의무와 그것을 부담하는 주체를 가리키는 fiduciary(수인자)는 영미회사법상의 핵심개념이다. 그 내용은 영국과 미국에서 반드시 동일하지 않고 또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고 있다. 이에 관해서는 이미 몇 차례 다룬 바 있지만(예컨대 2021.3.15.자; 2021.7.8.자 포스트) 오늘은 델라웨어주법상의 변화를 다룬 논문을 소개한다. David Kershaw, Delaware’s Fiduciary Imagination: Going-Privates and Lord Eldon’s Reprise, 98 Wash. U. L. Rev. 1669 (2021). 저자는 하바드에서 JSD학위를 받은 영국의 회사법교수(LSE)로 이 문제에 대해서 단행본(The Foundations of Anglo-American Corporate Fiduciary Law(Cambridge 2018))도 출간한 바 있는 전문가이다.
저자는 델라웨어주에서 수인자, 즉 신인의무를 부담하는 자는 원래 타인을 위한 활동을 수행한다는 약속을 하거나 그 활동을 수행할 권한을 보유한 자를 가리킨다고 하며 이런 전통적 견해를 권한/약속설(power/undertaking conception)이라고 부른다. 그는 수인자의 성실의무(duty of good faith)와 주의의무(duty of care)는 수인자라는 지위에서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위한 활동을 수행하는 권한/약속에서 도출되는 것으로 설명하고 나아가 이익충돌과 사익을 회피할 의무(즉 충성의무(duty of loyalty))는 성실의무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설명한다. 그런 권한을 부여한 것은 회사이므로 원칙적으로 수인자는 회사에 대해서 신인의무를 부담한다. 또한 이사회권한을 행사하는 다수주주와 같이 이런 회사권한을 탈취한 자도 회사에 대해서 신인의무를 부담한다,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20세기 중반부터 수인자로 보는 근거를 타인에 대한 부당한 영향력(undue influence)에서 찾는 새로운 견해(영향력설)가 출현하였다는 것이다. 영향력설은 권한/약속설에 비하여 경계가 불분명하며 수인자로 인정된 자는 폭넓은 충성의무를 부담하는데 델라웨어주법원은 이런 차이에 별로 주목하지 않았기 때문에 혼란이 존재한다.
논문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먼저 I장에서는 권한/약속설의 출현을 다루고 영향력설이 수인자의 이론으로 수용되는 과정과 그 영향을 살펴본다. 저자는 권한/약속설에 의하더라도 이사나 다수주주가 신인의무를 부담하는 상대방이 회사 뿐 아니라 주주를 포함하는 것이 모순이 아님을 판례를 통해서 보여준다. 저자에 따르면 영향력설은 거래당사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에 근거한 형평법적 관념으로 원래의 권한/약속설에 기초한 원래의 수인자 이론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에 의하면 일방이 타인에 대한 영향력을 이용해서 거래함으로써 부당한 이익을 얻은 것으로 의심되는 경우에는 그 당사자가 거래절차나 가격의 공정성을 증명하지 않으면 거래는 무효이다. 그런 영향력은 당사자들 사이에 지식의 차이가 있거나 의존관계가 있는 경우, 즉 불공정한 이익을 얻을 우려가 있는 경우 등에 인정되므로 실제로 인정될 여지가 상대적으로 훨씬 넓다. 그런 영향력 있는 자는 특정 거래와 관련해서만 의무를 부담한다는 점에서 원래의 수인자와 구별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결국 이들도 수인자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게 되었다. 이처럼 영향력 있는 자도 수인자로 불리다보니 원래의 수인자가 부담하는 신인의무, 특히 충성의무까지 부담하는 것으로 보게 되었는데 이로 인하여 발생한 문제에 대해서는 II장에서 지배주주가 관련된 거래, 특히 폐쇄회사화(going-private) 거래를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논한다. 유감스럽게도 이 부분의 논의는 너무 복잡해서 정리하는 것은 포기할 수밖에 없다. III장에서는 영향력설에 따른 수인자개념의 또 하나의 적용사례로 채권자에 대한 이사의 신인의무에 대해서 논한다. 저자는 영향력설에 따르면 채권자에 대한 이사의 신인의무도 인정되어야 하고 델라웨어주 판례도 한때 그런 태도를 보였지만 법관들의 현실인식이 작용하여 신인의무의 확장을 거부하게 되었다고 평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