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그런 경향이 좀 덜하지만 영국법은 미국법과 함께 영미법이란 명칭으로 불리는 경우가 많다. 하나의 용어로 불리다보니 자연히 양자가 비슷하지 않을까하는 선입관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특히 회사법의 경우 양자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미국법의 지위가 향상됨에 따라 우리나라에서는 상대적으로 영국법에 대한 관심이 크게 줄어든 것 같다. 그러나 세계무대에서 영국의 지위는 예전만 못하지만 회사법의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다. 과거 영국 식민지국가들, 즉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싱가폴, 홍콩 등의 경우 영국 회사법의 영향은 아직 압도적이라고 할 수 있다.
영국법에 대한 관심은 오래 전 “unfair prejudice remedy”나 “shadow director”로부터 시작되어 차츰 “wrongful trading”이나 “financial assistance” 같은 제도에까지 확산되었다. 마침내 지난 학기에는 대학원에서 내 일생 최초로, 그리고 아마도 마지막으로, 영국회사법에 대한 강의를 개설하게 되었다. 교재를 고를 때 짧은 책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었으나 제일 마음에 들었던 것이 Paul Davies교수의 책이었다. Oxford대학의 명예교수인 그는 영국의 대표적인 회사법학자로 Gower의 Principles of Modern Company Law라는 명저의 후속저자로도 유명하다. 그의 이름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고 이런 저런 자리에서 몇 차례 마주친 일도 있으나 서로 인사조차 나눈 적이 없었다. 그건 소심한 내 성격 탓도 있지만 대인관계에 조심스런 영국인의 특성에 기인한 면도 있을 것이다. 그와 처음 제대로 인사를 나눈 것은 2017년 Oxford에서의 작은 학술모임에서였고 2018년 1월에는 그의 초청을 받아 Oxford에서 강연을 하기도 했다. 그가 fellow로 있는 Harris Manchester College에서 머물며 그와 오랜 시간을 같이 보냈는데 세계적인 학자임에도 불구하고 정말 꾸밈없이 소박한 그의 인품에 흠뻑 매료되었다. 칠순이 넘은 그가 앞장서 길을 안내하다 살얼음에 미끄러질 때에는 잠시 섬찟하기도 했는데 평소 자전거를 즐겨 타며 다진 체력 덕분인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툴툴 털고 일어나서 안심이 되었다.
다시 책 이야기로 돌아와서 1200면을 넘는 대저인 Gower책이 아무래도 다소 장황한 감이 있는 것과는 달리 Davies교수의 책은 단순명료할 뿐 아니라 특히 짧다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다만 당시 나와 있던 제2판이 2010년판으로 조금 낡았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작년 5월 안부 겸해서 이메일을 보내며 혹시 개정판이 곧 나올 것인지를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바로 “You have hit the nail on the head!”라는 답신이 왔다. 번역하자면 “너 정말 제대로 맞췄다”라는 정도의 표현인데 솔직히 처음 보는 것이라 사전을 뒤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친절하게도 자신이 출판사에 보낸 최종교정본을 사용하라고 파일로 보내주었다. 파일이 유출되는 게 꺼림칙할 만도 한데 호의가 너무도 고마웠다. 학생들과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기 때문에 그 책의 내용은 잘 알게 되었다. 이 책은 영국회사법의 주요논점을 거의 빠짐없이 커버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론과 현실을 적절히 서술하고 있으며 분석의 수준도 높다. 짧은 책에서 논의의 심도를 높이다 보니 간혹 이해가 어려운 구석이 없지 않지만 큰 흠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회사법의 해부”(The Anatomy of Corporate Law)란 책의 공저자이기도 해서인지 기본적인 시각은 그 책과 유사하다. 물론 “회사법의 해부”가 이 책보다 더 어려운 책이기는 하지만 그 책을 읽은 독자라면 이 책도 어렵지 않게 소화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https://www.amazon.com/Introduction-Company-Law-Clarendon-ebook/dp/B0844XHB4K/ref=sr_1_46?crid=L1XL50MXS9CF&keywords=paul+davies&qid=1584665256&s=books&sprefix=Paul+Davies%2Caps%2C365&sr=1-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