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법에서 영미법과 대륙법 사이의 큰 차이 중 하나는 구제수단으로 specific performance(특정이행)을 인정하는 범위이다. 계약위반에 대한 구제수단은 영미법에서는 원칙적으로 손해배상이지만 대륙법에서는 특정이행이라고 설명된다. 법경제학자들은 영미법의 접근방식을 지지하는데 반하여 약속은 지켜야한다는 도덕적 관점에서는 대륙법적 접근방식을 지지한다. 이에 관한 문헌은 그야말로 무수하지만 오늘은 사적자치의 관점에서 특정이행의 문제를 검토한 최신 논문을 한편 소개한다. Hanoch Dagan & Michael Heller, Specific Performance(2020) 이 논문은 저자들이 오랜 기간에 걸쳐 발표한 선행연구를 토대로 작성한 것으로 기존의 여러 논의도 망라적으로 언급하고 있어 저자들의 견해에 대한 수용여부를 떠나 전체적인 논의의 동향을 파악하는데 매우 유익하다.
저자들은 계약을 사적자치의 수단으로 파악하는데서 출발한다. 당사자들이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는데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경우 그 도움을 확보하는 대가로 부담을 질 것을 약속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약은 필연적으로 “미래의 자기”를 구속하는 것을 의미한다. 저자들은 특정이행을 어느 범위까지 허용할 것인가의 문제를 현재의 자기가 미래의 자기에 대해서 부담을 지우는 것이 어느 범위까지 정당화될 수 있는가의 문제라고 본다. 계약위반을 이유로 상대방의 기대이익을 배상하는 것은 특정이행을 강제하는 것보다는 미래의 자기의 자기결정권을 덜 침해한다. 그리하여 저자들은 계약위반에 대한 구제수단으로 원칙적으로 특정이행 대신 손해배상을 채택해야한다고 보고 있다. 문제는 어떤 경우에 예외를 인정하여 특정이행을 강제할 것인가이다. 이와 관련하여 저자들은 세 가지 주장을 하고 있다. ➀당사자의 채무불이행으로 장래를 계획하는 수단인 계약의 기능이 중대하게 훼손되는 경우에는 특정이행을 허용해야한다. ➁당사자가 자신의 구체적인 계획에서 계약의 현실적인 이행이 중요하다는 점을 명시한 경우에는 특정이행이 인정되어야 한다. ➂고용계약과 같이 특정이행이 당사자의 미래의 자기결정권을 과도하게 침해하는 경우에는 특정이행을 인정해서는 아니 된다. 저자들의 이런 견해는 ➁를 제외하고는 영미법의 태도와 비슷하다. 저자들은 사적자치에 의한 계획적인 삶의 영위라는 관점에서 특정이행의 문제에 접근하는 자신들의 견해가 법경제학적 견해나 도덕적 견해에 비하여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더 우월하다고 보고 있다.
이 논문에 흥미를 느끼게 된 것은 계약을 미래의 자기의 자기결정권에 대한 제약으로 파악하는 이 논문의 관점이 회사법상의 계약에 관해서 내가 평소 생각하던 것과 같기 때문이다. 사실 회사(이사회)는 계획적인 사업수행의 과정에서 여러 가지 계약을 체결하는데 때로는 그 계약이 이사의 신인의무를 제한한다는 이유로 무효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계약은 다소간 미래의 행동범위를 제한하기 마련이라는 점에서 그런 이유만으로 그 계약의 효력을 부정하는 견해에는 동조할 수 없었다. 보다 어렵고도 중요한 문제는 미래의 이사회의 행동범위에 대한 제한을 어느 범위까지 허용할 것인가를 정하는 문제라고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