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임박회사와 이사의 신인의무

도산임박회사에서 심화되는 주주와 채권자 사이의 이익충돌을 고려하여 이사에 특별한 의무를 부과할 필요가 있는지에 관한 논의는 국내에서도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오늘은 그 문제에 관한 최신 논문을 소개한다. Amir Licht, My Creditor’s Keeper: Escalation of Commitment and Custodial Fiduciary Duties in the Vicinity of Insolvency(2020)

저자는 이스라엘의 Radzyner법대 교수로 국제적으로 활발하게 활동 중인 회사법학자이다. 약 20년 전 처음 만난 것을 시작으로 몇 차례 학회에서 마주친 일이 있다. 그는 기업지배와 문화의 관계에 특히 관심이 많은 학자로 2006년에는 그의 소개로 Berkeley에서 열린 심포지엄에 초청받아 한국의 CEO보수에 대해 발표했던 인연도 있다. 작년 프랑크푸르트 학회에서 10여년 만에 상봉했는데 갑자기 아직도 모친과 함께 사냐고 물어 놀랐다. 아마도 처음 만났을 때 잠시 그런 대화를 나눴던 모양인데 오래 전에 흘려들은 이야기를 잊지 않고 있는 것은 비상한 기억력과 “문화”에 대한 관심의 탓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스라엘 학자들은 대부분 영어가 유창하지만 그는 특히 액센트도 거의 없어 발표를 들을 때마다 부러웠다.

논문에서 저자가 강조하는 점은 다음 두 가지이다. ➀도산임박기업의 문제로 보통 지적하는 것은 경영자가 기회주의적으로 위험한 사업에 손을 대는 것(risk-shifting)이다. 그것은 그럴듯한 이야기긴 하지만 실제로 그런 사례는 별로 없고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은 이른바 “escalation of commitment”란 현상이다. 이는 심리학 용어로 “몰입상승 효과”라고 번역되는데 위키백과에서는 “분명히 잘못된 결정이나 실패할 것이 확실한 일에 고집스럽게 집착하는 심리를 말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회사지배와 관련해서는 경영자가 자신이 결정한 사업이 성공하지 못할 것이 거의 확실한 시점에 이르러서도 마냥 사업을 지속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내가 전에 발표한 논문에서 “지연문제”라고 불렀던 것과 비슷한 현상인데 그런 문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널리 퍼져있는 것으로 보인다.

저자의 두 번째 주장은 ➁도산임박기업의 이사는 다소간 채권자이익을 보호할 의무를 부담하는데 이사에게 신탁에서의 보관수탁자적 의무(custodial duties)를 부담시키자는 것이다. 저자는 도산임박회사의 이사는 회사재산의 보전을 목표로 해야 하고 따라서 회사이익극대화를 위해서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거나 해서는 안 되며 경영판단원칙이 적용되는 범위는 평상시에 비하여 협소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이런 주장은 이 블로그에서 몇 번 언급한 바 있는 Hu와 Westbrook의 견해(Henry Hu & Jay Lawrence Westbrook, Abolition of the Corporate Duty to Creditors, 107 Columbia Law Review 1321 (2007))와는 상반되는 것이다.

논문은 다음과 같이 구성된다. 먼저 II에서 risk-shifting에 대해서 설명한 후 III에서는 몰입상승현상에 대해서 상세히 검토한다. 보관수탁자적 의무에 관한 IV에서는 신탁법상의 내용을 살펴본 후 그것이 어떻게 몰입상승현상을 억제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언급한다. 이 부분은 위 ➀과 ➁를 연결하는 부분이라고 하겠는데 유감스럽게도 논의는 충분한 것 같지 않다. V는 비교법적 고찰로 미국, 캐나다, 영국, 호주, 뉴질랜드 등 영미법국가들만을 다루고 있는데 독일 등 대륙법국가들을 전혀 다루고 있지 않은 것도 아쉬운 부분이라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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