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주식법은 주주의 신인의무에 대해서 규정을 두고 있지 않다. 그러나 성문법국가인 독일의 학설, 판례는 주주의 신인의무를 인정한다. 그것을 인정한 독일연방대법원(BGH)의 Linotype판결은 1988년에 나왔다. 나는 1990년 독일 유학 시에 그 판결을 처음 접하고 무척 반가웠다. 귀국 후 그에 관한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김건식, 소수주주의 보호와 지배주주의 성실의무(1991), 회사법연구I 203면) 그 후 독일법의 사정을 파악할 수 있는 짤막한 영문논문을 발견했기에 소개한다. Andreas Cahn, The Shareholders’ Fiduciary Duty in German Company Law (2017). 저자인 Cahn교수는 2015년 막스플랑크연구소 주최로 개최된 한, 중, 일, 독 4개국 비교회사법 세미나에서 처음 만났다. 내가 사회를 맡은 세션의 발표자였는데 앞 세션의 시간초과로 부득이 발표시간을 단축해야만 했다. 발표직전 시간단축을 요청했는데도 짧은 시간 내에 발표를 마쳤을 뿐 아니라 발표가 유창하고 군더더기 없이 깔끔해서 정말 감동을 받았다.
그의 논문은 다음과 같이 읽기 쉽게 교과서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➀ 신인의무의 근거
➁ 신인의무의 목적과 범위
➂ 부담주체
➃ 부담상대방
➄ 구제수단
➅ 공개회사 주주에게 신인의무를 인정한 판례
➆ 결론
이하에서는 위 논의 중에서 주목할 점을 몇 가지만 지적하기로 한다. 먼저 ➀신인의무의 근거에 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제시되고 있는데 모두 법문에서 근거를 찾질 않고 기능적인 분석에서 찾고 있다. 첫째 견해는 그 근거를 정관의 불완전계약으로서의 성격에서 찾고 있는데 그에 의하면 신인의무는 정관 작성 시에 예견할 수 없었던 상황이 발생한 경우에 대처하기 위해서 인정하는 것으로 주주는 회사나 다른 주주의 이익에 반하는 방식으로 주주권을 행사해서는 아니된다는 것이다. 둘째 견해는 신인의무를 공동의사결정이 개별 주주의 투자에 미치는 영향에 대처하기 위한 수단으로 정당화하고 있다.
➁와 관련하여 내가 주주의 신인의무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주로 지배주주의 전횡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가치에 주목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독일법상 주주의 신인의무는 주로 주주권의 남용을 막기 위한 수단으로 논의되고 있다. 이는 아마도 독일에는 우리 재벌총수 같이 이사직은 맡지 않으면서도 의사결정을 지배하는 존재가 드물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➂신인의무를 부담하는 주체와 관련하여 독일법의 특징은 지배주주가 회사인 경우, 즉 콘체른의 경우에는 주식법에 구체적인 규정을 따로 마련하고 있다는 것과 지배주주 뿐 아니라 소수주주도 신인의무를 부담한다는 점이다. 또한 일부 학자들은 회사의 경영권을 취득하는 미래의 주주들도 신인의무의 주체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나 아직 널리 수용되지 않고 있다.
➃와 관련 신인의무의 상대방이 주주는 물론이고 회사까지 포함된다는 점은 미국법에서와 비슷하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회사에 대한 의무는 주주에 대한 의무에서 파생된 것으로 본다는 점이다. 독일의 학설판례는 1인주주가 회사에 대해서 신인의무를 부담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일치하고 있다. 채무자에 대한 신인의무는 부정하고 있다.
우리 학계에서 독일법의 영향력은 갈수록 약화되는 것 같다. 그러나 이론적으로나 실무적으로 독일법학에서 우리가 배워야할 것은 한둘이 아니다. 인터넷에서 구할 수 있는 정보가 넘쳐나는 오늘날 가장 큰 난점은 역시 언어의 장벽이라고 하겠다. 그나마 다행스런 것은 요즘은 독일 학자들도 글을 영어로 발표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는 점이다. 과연 내 생전에 컴퓨터의 번역기능이 더 발달하여 언어의 장벽이 무너지는 날을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