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무상 계약서를 작성할 때에는 boilerplate조항이라고 불리는 관용적 조항이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 경향은 특히 사채계약과 같은 금융거래 계약서에서 두드러진다. 계약서에 사용되는 관용적 조항이나 관용문구는 거래비용을 절감하는 장점이 있는 반면에 때로는 당사자들의 의사에 부합하지 않는 결과를 초래할 위험도 수반된다. 오늘은 관용적 조항에 관한 최신 연구 한편을 소개한다. Stephen J. Choi, Mitu Gulati & Robert E. Scott, Innovation versus Encrustation: Agency Costs in Contract Reproduction (2020). 저자들은 모두 이 방면에 많은 업적을 쌓은 미국의 정상급학자들이다. 특히 Choi교수는 나와 논문도 한편 공저한 일도 있을 정도로 가까운 한국계학자로 NYU로스쿨에서 증권법과 회사법을 가르치고 있다.
이번 논문은 계약서에서 관용적 조항과 관용문구의 사용빈도와 계약서를 작성하는 변호사의 대리비용과의 관계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저자들은 관용적 조항과 관용문구를 encrustration이란 용어로 표현하는데 이곳에서는 대신 관용문구란 표현을 사용하기로 한다. 저자들의 가설은 계약서에서 관용문구가 차지하는 비중은 변호사들의 대리비용에 좌우된다는 것이다. 고객이 변호사를 감독하는 정도가 강할수록 변호사는 고객의 이익을 반영하기 위해서 신경을 더 쓰게 되고 반대로 고객의 감독이 약할수록 변호사는 널리 사용되는 관용문구를 이용하여 계약서를 쉽게 작성할 유혹에 빠지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 논문은 이런 대리비용가설이 과연 실제로 타당한지를 실증적으로 검토한 것이다. 이들은 고객이익을 위해서 관용문구 대신 새로운 조항을 도입할 필요가 발생한 경우에 관용문구의 대체가 발생하는 정도가 계약유형에 따라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조사했다. 대상으로 삼은 것은 4가지이지만 특히 중요한 것은 ➀사모펀드에 의한 M&A계약과 ➁국채발행계약의 두 가지 계약유형이다. ➀은 변호사의 대리비용이 낮은 경우인데 반하여 ➁는 대리비용이 높은 경우이다. ➀의 경우 계약서를 작성하는 것은 변호사지만 거래에 이해관계가 큰 사모펀드가 변호사의 작업을 감독하므로 변호사는 고객인 사모펀드 이익을 위해서 필요하다면 관용문구 대신 새로운 조항을 도입할 인센티브가 클 것이다. 반면에 ➁의 경우에는 계약서를 작성하는 변호사를 감독하는 책임이 있는 정부관료도 국가의 관점에서는 대리인에 불과하기 때문에 2중적인 대리문제가 발생한다. 따라서 저자들의 가설에 의하면 ➁의 경우에는 새로운 조항을 도입할 인센티브가 약할 것이다. 저자들이 새로운 조항으로 관용문구를 대체할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계기로 삼은 것은 준거법조항의 해석에 관한 변화였다. 2009년부터 시작해서 실무가들 사이에서는 준거법조항에서 특정준거법이 당해계약에서 발생하는 비계약적사항(noncontractual matters)에도 적용된다는 점을 명시하지 않으면 법원이 준거법조항을 그 사항에 적용되지 않을 위험이 있다는 견해가 확산되었다. 2017년에는 그런 취지를 밝힌 판례도 등장하였다. 저자들은 이런 변화가 실제로 계약서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를 조사하였다. 그들이 발견한 것은 다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사모펀드의 M&A계약에서는 준거법조항의 관용문구를 수정하여 비계약적사항에 대한 적용을 명시하는 문구를 처음으로 채택한 경우가 회사채나 국채계약에서보다 증가했다. 이는 저자들의 대리비용가설과 부합하는 결과였다. 그러나 그들이 발견한 또 하나의 결과는 대리비용가설과는 일견 부합하지 않는 결과였다. 그들은 사모펀드 변호사들이 작성한 준거법조항에서 다른 계약의 경우보다 더 많은 관용문구를 발견했다. 저자들은 그 원인을 로펌의 계약서 작성관행에서 찾고 있다. 그들에 의하면 대체로 로펌에서는 새로운 문구를 채택하면서 그것을 독창적으로 작성하는 대신 다른 계약서의 문구를 그대로 복사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저자들은 사모펀드 변호사들이 작성한 준거법조항에 관용문구가 더 많은 이유는 비계약적사항에 관한 문구를 삽입할 때 거기에 붙어있는 다른 관용문구까지 한꺼번에 복사하여 삽입한 결과가 아닌가 추측하고 있다.
이 논문은 매우 실무적인 주제를 매우 이론적인 각도에서 분석하고 있다. 이 논문은 저자들의 주장이 설득력 있는지 여부와는 별도로 계약실무에 관한 여러 가지 흥미로운 내용을 담고 있다. 예컨대 저자들은 사채계약서의 작성과정을 공장 조립라인에 비유하고 있는데 심한 경우 계약서가 3분30초만에 작성되는 사례도 있다는 이야기는 가히 충격적이다. 그렇다고 해서 저자들이 그런 관용적 계약서 사용을 반드시 비판적으로 보는 것은 아니다. 주어진 상황에서는, 그리고 비용편익의 관점에서는 독창적인 계약서 보다 관용적 계약서가 더 합리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