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이사의 감시의무는 1996년 델라웨어주법원이 선고한 유명한 Caremark판결 이후 흔히 Caremark의무라고 불리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Caremark의무는 받은 관심에 비해서는 실제 효과가 그리 크지 않았다. Caremark의무 위반책임을 묻는 주주대표소송을 제기하는데 필요한 정보를 원고가 확보하지 못하여 각하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피고의 소각하신청을 기각하는 결정이 잇달아 선고되면서 감시의무에 새로운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오늘은 그 변화의 원인과 앞으로의 영향을 심층 분석한 최근 논문을 소개한다. Roy Shapira, A New Caremark Era: Causes and Consequences, Washington University Law Review (forthcoming). 저자는 이미 이 블로그에서도 두 차례(2020.10.28.자, 2020.7.1.자)나 논문을 소개한 바 있는 뛰어난 이스라엘 학자이다. 이번 논문은 2020.7.1.자 포스트에서 소개한 회계장부열람권에 관한 논문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 논문은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I장에서는 최근에 이르기까지 감시의무의 기준에 관한 판례의 변천을 짚어본다. II장에서는 최근의 감시의무 활성화를 뒷받침한 주된 원인으로 장부열람권의 역할에 주목하고 양자의 관계를 설명한다. III장에서는 그런 변화가 앞으로 미칠 영향에 대해서 논한다. 이하에서는 각장의 내용을 간단히 부연설명하기로 한다.
I장의 서두를 장식한 것은 이사에 능동적인 감시의무가 있음을 선언한 Caremark판결이다. 이 판결은 컴플라이언스에 대한 이사의 인식을 깨우치는 데는 성공했으나 이사의 감독기능을 실제로 변화시키지는 못했다. 그 이유를 설명하려면 미국의 대표소송제도에 대한 설명에서 출발할 필요가 있다. 미국에서도 주주가 대표소송을 제기하려면 먼저 이사회에게 제소신청을 해야 한다. 미국에서도 이사회가 동료이사에 대한 제소에 나설 가능성은 낮다. 그러나 미국법상 이사회의 불제소결정은 경영판단으로 주주대표소송을 봉쇄하는 효과를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원고주주로서는 이사회에 대한 제소신청이 무익함(futility)을 입증하여 그 요건의 면제를 구하는 것이 보통이다. 무익성은 제소여부를 판단할 이사들도 공동책임의 가능성이 상당히 존재하는 경우에 인정된다.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이사들의 주관적 상태에 관한 구체적인 사실을 기재할 필요가 있는데 그런 정보는 증거개시(discovery)절차를 거치기 전에는 얻기 어렵기 때문에 결국 소송을 통해서 이사의 책임을 묻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이런 상황은 2019년6월 이후 델라웨어주법원이 피고의 소각하신청을 기각한 사례가 4건이나 나오면서 바뀌게 되었다. 이들 판결에서 법원은 회사의 명운을 좌우하는 규제에 대해서는 이사들이 특별한 주의를 갖고 컴플라이언스 감독에 능동적으로 나서도록 요구함으로써(이른바 mission critical compliance) 이사에게 요구하는 감시의무의 수준을 높였다. 저자는 이런 감시의무에 관한 판결의 변화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의 경향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판단한다.
II장에서 저자는 감시의무에 관한 판결의 변화가 주로 주주의 장부열람권에 관한 판례의 변화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즉 원고주주의 정보부족현상이 최근 델라웨어주법원이 주주의 장부열람권을 폭넓게 허용함에 따라 상당부분 해소됨으로써 이사의 감시의무 위반책임을 묻는 주주대표소송이 각하를 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저자는 장부열람권의 요건을 유연하게 해석하고 있는 최근 델라웨어주법원판결들을 소개한다. 지난 번 포스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법원은 정당한 목적도 넓게 인정하지만 회사가 제공할 정보의 범위를 특히 폭넓게 인정하고 있다. 이제 이사회의사록 같은 정식 문서는 물론이고 이사들 사이의 이메일이나 SNS문자 같은 것도 장부열람권의 대상이 되었다. 주주들은 장부열람권행사를 통해서 얻은 자료를 토대로 이사의 주관적 상태를 보여주는 사실을 소장에 구체적으로 기재할 수 있게 되었다.
III장은 이런 판례의 변화가 초래하는 현실적인 효과에 대해서 고찰하는데 이 논문의 가치는 주로 이 부분에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실제로 감시의무위반책임을 묻는 주주대표소송이 장부열람권의 도움으로 각하를 면한다고 해도 피고이사가 반드시 패소하는 것은 아니고 또 실제로 패소판결이 선고된 경우라도 피고이사가 개인적인 비용으로 배상금을 지급해야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소송으로 인한 경제적 또는 심리적 부담과 평판훼손의 위험이 이사들의 행동을 제약하는 기능을 갖는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그에 따른 회사내부의 외형적인 변화로 컴플라이언스활동의 문서화와 정보소통의 촉진을 강조한다. 특히 최근 판례를 반영하여 로펌들은 고객들에게 이사회의사록에 이사회가 회사의 컴플라이언스 관련 주요 이슈에 대해서 적절한 보고를 받았다는 기록을 남기도록 권고하고 있다. 저자는 이런 문서화가 단순히 장식에 그치지 않고 실제적으로도 이사회에 대한 정보보고와 이사회의 관심을 촉진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음을 지적한다.
저자가 특히 역점을 두는 것은 평판훼손의 위험에 따른 압력이다. 이제 과거와 달리 회사내부의 정보가 열람청구소송과 감시의무위반책임을 묻는 대표소송을 통해서 외부에 공개될 가능성이 대폭 높아지게 되었다. 또한 델라웨어주법원은 이사의 법적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경우에도 그 행동이 부적절하다고 판단되는 경우에는 판결문에서 그에 대해서 따끔하게 지적하는 사례가 많다. 그리하여 이사로서는 평판의 훼손이나 인간적인 수모를 피하기 위해서 행동을 조심할 인센티브를 갖게 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저자는 회사의 불법행위는 사적 소송만으로는 봉쇄할 수 없지만 장부열람권에 힘입은 새로운 감시의무소송은 회사의 평판에 대한 위협에 기초한 억지력을 어느 정도 갖고 있다는 점에서 회사의 불법행위를 막는 다른 장치, 즉 규제와 내부컴플라이언스가 지닌 약점을 다소나마 보완한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법적 책임만이 아니라 정보공개를 통해서도 회사행동을 통제할 수 있다는 저자의 견해는 그가 작년에 Cambridge University Press에서 출간한 단행본 “Law and Reputation”에서 보다 본격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참고로 2020년12월 델라웨어주 대법원은 AmerisourceBergen Corporation v. Lebanon County Employees’ Retirement Fund and Teamsters Local 443 Health Services & Insurance Plan, No. 60, 2020 (Del. 10, 2020)판결에서 장부열람권 행사를 폭넓게 인정하는 태도를 계속 유지하였다. (그 판결에 관해서는 하바드 블로그 2021.1.23.자 포스트 참조)
[추가 2021.1.31.] 델라웨어형평법원은 2020.12.31 선고한 Richardson v. Clark판결에서 위 논문 I장의 설명과는 달리 감시의무위반을 주장하는 원고에게 여전히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였다. 이 판결에 관한 해설로는 콜롬비아 블로그 포스트 (2021.1.28.)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