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판단원칙과 내용적 요건

경영판단원칙이란 경영자가 신중하게 내린 결정은 그것이 후에 실패로 판명된 경우에도 경영자의 법적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원칙을 가리킨다. 경영자의 판단을 존중함으로써 경영자를 보호하기 위한 원칙이기 때문에 당해 결정의 내용이 터무니없는 것이 아니라면 법원이 그 당부를 따지는 것은 삼가야할 것이다. 이처럼 내용적 요건은 경영판단원칙과 조화되지 않는 면이 있지만 어느 곳에서도 완전히 포기하고 있지는 않다. 우리 대법원은 “그 내용이 현저히 불합리하지 않은 것으로서 통상의 이사를 기준으로 할 때 합리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범위 안에 있[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대법원 2007.10.11, 2006다33333 판결 등). 경영판단원칙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는 미국에서는 우리보다는 내용적 요건이 한결 완화된 것으로 보인다.

1994년 공표된 ALI원칙은 다음과 같은 요건이 충족되는 경우에는 선의로(in good faith) 경영판단을 한 이사는 주의의무를 이행한 것으로 본다고 규정함으로써 경영판단원칙을 정의하고 있다(§4.01(c).

① 경영판단 대상에 이익충돌이 없을 것

② 경영판단 대상에 관해서 그 상황 하에서 적절한 것으로 합리적으로(reasonably) 믿을 정도로 알고 있을 것

③ 경영판단이 회사의 최선의 이익에 합치한다고 이성적으로(rationally) 믿을 것.

여기서 내용적 요건은 ③인데 거기서 말하는 “이성적”이란 것이 무슨 의미인지, ②의 “합리적”이란 것과 어떻게 다른지가 석연치 않았다. 그리하여 “이성기준은 합리성기준보다 수준이 낮은 기준으로 일응 어느 정도 일관된 설명이 가능한 경우에는 충족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슬그머니 넘어가고 말았다. 그런데 마침 Bainbridge교수가 바로 이 문제에 관한 포스트를 업로드하고 있어 그것을 소개한다.

현재 ALI는 기업지배구조에 관한 Restatement를 작성 중인데 경영판단원칙은 조문번호만 §4.02로 바뀌었을 뿐 내용적 요건에 관한 부분은 ALI원칙과 완전히 동일하다. 그에 관해서 Reporter는 다음과 같은 주석을 붙이고 있다: “델라웨어주법을 적용한 일련의 판결은 경영판단원칙상 회사의 결정은 어떠한 이성적 목적(rational purpose)과도 결부될 수 없는 경우가 아닌 한 지지될 것이라는 기준을 뒷받침한다.“ Bainbridge교수는 이 주석에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하면서도 그 점에 관한 부연설명을 추가하고 있다.

그는 ”이성적 목적“에 관한 언급은 결정의 내용에 대한 실질적 심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고 단언하며 두 사람의 견해를 인용한다. 하나는 Dooley교수의 다음과 같은 말이다. ”Sinclair판결에서 말하는 이성적이란 [용어]는 생각할 수 있는 내지 상상할 수 있는(conceivable or imaginable) 것과 같은 말이고 이사회의 판단이 정상적인 경영상의 이유에 따른 것일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법원은 그것을 쳐다보지도 않겠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그것은 각 이사가 그의 결정에 대한 이성적 이유의 증거를 보유하고 제시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 것이 명백할 뿐 아니라 그러한 명제에 대한 정당한 근거로 인용될 수 없다.“ 다른 하나는 Allen판사가 Caremark판결에서 한 다음과 같은 말이다. ”사후에 문제를 심사하는 법관이나 배심이 어떤 결정이 실질적으로 틀렸거나 틀린 정도가 ‘어리석은’(stupid) 것을 넘어 ‘지독하거나 비이성적인’(egregious or irrational) 것에 이르더라도 결정의 과정이 이성적이거나 회사이익을 증진시키기 위한 선의의 노력으로 채택된 것이라고 법원이 판단하는 한 이사에게 책임을 지우는 근거가 될 수 없다. 이와 다른 법칙, 즉 결정의 “객관적인” 평가를 허용하는 법칙을 택하는 경우에는 이사들을 역량을 갖추지 못한 법관이나 배심에 의한 실질적인 사후판단에 맡기는 셈이 되고 이는 장기적으로 투자자이익을 해칠 것이다.“ 이 판시에 따르면 내용에 대한 법원의 심사는 극히 제한될 수밖에 없는데 Bainbridge교수는 지독하거나 비이성적이라고 판단되는 경우는 사실상 경영판단원칙의 적용을 배제하는 요소인 악의(bad faith)나 이익충돌이 존재하는 경우와 비슷할 것이라고 본다. 그는 내용적 요건을 충족하지 못해서 경영판단원칙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존재함을 부정하지는 않으면서도 이성(rationality)의 요건은 자칫하면 합리성(reasonableness)의 요건으로 확대되기 쉬우므로 주의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요컨대 rationality와 reasonableness의 구별은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나만이 아니라 미국의 법률가들에게도 쉽지 않은 문제인 것이다.

우리 대법원이 내용적 요건으로 채택한 “현저한 불합리” 개념은 미국의 “非이성” 개념보다는 훨씬 더 넓은 느낌이 있다. 예컨대 대법원은 8개월 전에 주당 1만원에 인수한 주식을 특별한 사정이 없음에도 계열회사에 주당 2,600원에 매도한 것은 현저히 불합리하다고 보아 선관주의의무의 위반을 인정한 바 있다(대법원 2005.10.28, 2003다69638 판결(삼성전자주주대표소송)). 이 판결의 사안은 이익충돌이 존재하는 경우였으므로 현저한 불합리를 인정한 법원의 판단에 이익충돌의 존재가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도 없지 않을 것이다. 동일한 사안에 대한 재판이 미국에서 있었더라도 결론에는 차이가 없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두 나라 법 사이의 실질적인 차이는 그렇게 크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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