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법과 준법우선주의

최근 회사법에 관한 국내외의 논의는 주로 ESG를 비롯한 이해관계자이익이나 회사의 목적에 집중되고 있다. 이 블로그에서는 가급적 그에 대한 소개를 자제한다는 방침을 정하고 있지만 간혹 예외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 소개하는 논문도 그런 예외에 속한다. Asaf Raz, The Legal Primacy Norm, 74 Fla. L. Rev. 933 (2022). 저자는 전에도 한번 소개한 바 있는 이스라엘 출신의 젊은 학자이다(2021.2.26.자). 논문에서는 주주이익우선주의와 회사의 사회적책임(CSR)사이의 대립을 극복하는 대안적인 개념으로 준법우선주의(legal primacy)란 개념을 내세운다. 준법우선주의는 경영자의 준법의무를 강조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는데 주주이익우선주의는 물론이고 회사의 사회적책임과도 구별된다. 먼저 준법우선주의가 주주이익우선주의와 다르다는 점에 대해서 저자는 상당한 지면을 할애하고 있지만 그에 대해서는 특별히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경영자가 주주이익을 극대화하는 의무도 법을 준수하는 범위 내에서만 인정된다는 점은 어느 곳에서고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논문에서 주목할 부분은 CSR과의 대비이다. CSR은 막연한 개방적인(open-ended) 개념으로 경영자가 그것을 어느 범위까지 추구해야 하는지가 불명확하기 때문에 결국 경영자의 경영판단에 맡길 수밖에 없다. 저자에 따르면 이처럼 경영자의 재량을 넓게 인정하는 것은 회사나 주주의 관점에서는 물론이고 이해관계자의 관점에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저자는 이해관계자의 이익을 법으로 규정하고 경영자에게 준법의무를 부과하는 것이 이해관계자의 이익을 증진하는데 더 나은 것으로 본다. 저자는 현실적으로 법이 불완전하고(non-optimal gap), 법의 준수도 불완전(compliance gap)하며 법위반에 대한 집행도 불완전(enforcement gap)하다는 점을 인정한다. 이러한 전반적인 법의 불완전성이야말로 통상 CSR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제시되는 것이지만 저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관계자 이익을 CSR로 해결하기보다 법으로 보호하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한다. 법의 불완전성은 의회나 행정위원회에서 시정하는 것이 정도이고 델라웨어형평법원에서 경영자의 CSR의 문제로 다투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것이다. 저자는 현실적으로 준법우선주의가 이해관계자이익의 보호를 위해서 작동하는 여섯 가지 경우를 상세히 제시한다. ①수인자의 선의의무(good faith), ②이사의 감시의무, ③배당과 자기주식취득에 대한 제한, ④도산에 임박한 회사의 목적변경, ⑤우선주주의 우위, ⑥법위반회사의 강제해산.

준법우선주의에 관한 저자의 견해를 뒷받침하는 것은 회사의 법인격에 대한 저자의 시각이다. 회사를 주주와 동일시하고 또 회사를 계약의 연쇄로 파악하는 계약설적 회사관이 미국 학계의 주류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회사를 주주와는 별개의 실재로 보는 법인실재설적 사고를 견지한다. 저자는 경영자가 주주의 이익과 무관하게 준법의무를 부담하는 근거를 회사의 독립적 법인격에서 찾고 있지만 준법의무를 반드시 법인실재설로만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보다 관심을 끄는 것은 저자가 계약설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보니 정관자치에 의한 회사법리의 수정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라는 점인데 이와 관련해서는 정관상의 중재합의조항에 대한 지난 번 포스트(2021.2.26.자)에서도 언급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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