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적대적기업인수법제

서양의 학계에서는 논문이나 책 제목으로 독창적인 문구가 사용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오늘은 그런 기발한 제목에 끌려 읽게 된 최신 문헌을 소개한다. Luca Enriques & Matteo Gatti, Death by a Thousand Cuts: The Hostile Bids Regime in Europe, 2004-2023 (2024) 눈길을 끈 것은 “능지처참”을 의미하는 제목의 앞 부분이다. 수천 번의 칼질로 사람을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이는 야만적 형벌을 가리키는 것으로 중국에서는 능지처참 대신 대명률의 용어인 “凌遲處死”가 더 일반적으로 사용된다. 이런 중국식 형벌이 유럽의 적대적기업인수법제에 관한 논문의 제목에 동원되었으니 호기심이 일어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 논문을 소개까지 하게 된 것은 그 내용이 매우 유용하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이태리 출신으로 각자 영국과 미국에서 활동하는 회사법학자들이 쓴 이 논문은 EU의 기업인수지침이 기업인수시장을 육성할 목적으로 마련되었지만 이후 경제, 정치, 법, 지배구조의 변화로 말미암아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음을 보여준다. 본문이 22페이지에 불과한 이 논문은 서론과 결론을 제외하면 3개의 장으로 구성된다. 먼저 II장에서는 EU의 정책담당자들이 역내의 기업인수시장을 통합, 육성하기 위하여 지침을 제정하던 당시의 상황을 설명한다. 이들은 기업인수시장의 발전에는 적대적 기업인수도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다고 보고 영국의 모델에 따라 이사회의 중립성과 주주의 최종결정권을 내용으로 하는 안을 마련하였으나 독일을 비롯한 회원국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했다. 이어서 통과된 지침은 회원국들 사이의 타협을 반영하여 대폭 완화되어 이사회의 중립성원칙과 break-through원칙조차도 회원국들의 선택에 맡겼다. 그리하여 적대적 기업인수에 대한 법제는 상당부분 회원국들이 좌우할 수 있었고 회원국들은 경영권보호를 용이하게 하는 입법을 채택하였다. 저자들은 이처럼 적대적 기업인수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이 득세하게 된 배경으로 지배구조, 지정학적 상황, 금융위기 등의 거시경제적 충격 등을 언급한다.

III장(논문에서는 IV장으로 잘못 표시)에서는 “능지처참”에 해당하는 현상으로 다음과 같은 법적 측면에서의 각종 변화를 조망한다. ①기업인수법과 금융시장법의 변화, ②회사법과 지배구조관행의 변화, ③외국인직접투자를 통제하는 입법의 확산. ①과 관련해서는 예컨대 적대적 기업인수의 대상이 된 회사의 신주를 저가로 인수할 수 있는 권리(이른바 Bons Bréton)와 같은 일종의 포이즌필과 발판매수의 억제효과를 갖는 내부자거래금지조항을 담은 시장남용규정(Market Abuse Regulation)을 논한다. ②와 관련해서는 충성주식(loyalty shares)(2021.4.23.자)를 검토한다.

IV장(논문에서는 V장으로 잘못 표시)에서는 이러한 적대적 기업인수를 막는 일종의 “해자”(moat)가 결국 누구의 이익에 봉사하는가에 대해서 의견을 밝힌다. 저자들은 이러한 상황은 지배주주를 비롯한 대주주와 경영자 같은 내부자와 정치인들의 이익에 부합하고 일반주주들에게는 불리하다고 지적한다. 나아가 저자들은 이러한 상황이 일반투자자나 근로자의 이익에 부합하는지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이런 논의는 우리 지배구조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타당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어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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