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어는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열어주는 열쇠와 같다. 외국어가 열어준 새 세상은 자칫 단조로운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 준다. 아직도 내세울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젊어서 배운 일본어는 평생 도움이 되었다. 일본어가 가져다 준 즐거움 중 하나가 “라쿠고”(落語)이다. 라쿠고는 에도시대부터 서민들의 애호를 받은 일본의 고유한 전통 예능의 한 장르이다. 혼자서 말로 하는 공연이란 점에서는 미국식 스탠드업 코미디나 이제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자취를 감춘 만담과 비슷하다. 그러나 전통의상인 “하오리”(羽織) 차림으로 방석 위에 정좌한 상태로 연기하는 겉모습에서부터 차이가 난다. 다채로운 인물의 말투와 몸짓을 해학적으로 재현하는 것은 스탠드업 코미디와 공통되지만 그 모사의 완성도는 적어도 두어 수는 위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보다 더 의미 있는 차이는 오히려 그 형식에 있는지도 모른다.
스탠드업 코미디는 하나의 줄거리로 구성된 경우는 드물고 잡다한 (그리고 많은 경우 서로 무관한) 우스갯소리를 이어가는 것이 대부분인데 비하여 한편의 라쿠고는 하나의 스토리를 중심으로 꾸며지는 것이 보통이다. 화자(話者)인 落語家는 주된 이야기(本題)에 들어가기 전에 분위기를 돋우기 위해서 으레 신변잡담으로 말머리를 삼는 것이 정해진 흐름인데 이를 “마쿠라”(枕: 베게)라고 한다. 때로는 도입부인 마쿠라가 마구 길어지거나 본제보다 더 웃음을 끌어내는 경우도 왕왕 있다. 마쿠라로 객석의 분위기가 어느 정도 무르익을 무렵이면 화자는 천천히 하오리의 옷고름을 풀며 본격적으로 이야기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와 함께 좌중은 아연 숙연해지며 화자에 집중하게 된다. 라쿠고의 이야깃거리(ネタ)는 실로 각양각색이다. 이른바 골계담(滑稽談)과 인정담(人情談)이 주류를 이루지만 그밖에도 다양한 주제들이 다루어진다. 특히 에도시대부터 유래하는 고전(古典)라쿠고에 비하여 2차대전 후 새롭게 등장한 신작(新作)라쿠고의 경우에는 현대의 각종 사회상을 반영한 것이 많다. 어떤 종류이던 결국 목적은 등장인물의 심리와 정서를 예리하게 포착하여 풍자하고 그의 말투와 몸짓을 적나라하게 흉내냄으로써 일상에 지친 관객을 달래고 웃음을 끌어내는 것이다. 라쿠고의 묘미는 마무리에 있는데 마지막은 짤막한 반전으로 마치는 경우가 많다. 이런 마지막의 반전을 “오찌”(落ち)라고 하는데 라쿠고란 명칭도 거기서 유래한 것이다.
라쿠고는 얼핏 자연스런 만담처럼 보이지만 실은 마쿠라부터 오찌에 이르기까지 치밀한 계획에 의하여 짜여진 것이다. 라쿠고의 요체는 모든 것이 철저하게 계산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겉으로는 화자가 마치 즉흥적으로 천연덕스럽게 익살을 부리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화자의 자연스러움이 사라지는 순간 관객의 환상도 깨지고 고단한 현실이 밀려오기 때문이다. 이런 고도의 자연스러움은 오랜 수련과정을 견뎌내야만 도달할 수 있다. 그 과정은 소리와 몸짓 하나 하나를 익혀나가는 경극(京劇)배우의 수련에 견줄 수 있을 것이다. 라쿠고의 형식미, 그리고 자연스런 겉모습의 배후에 존재하는 완벽한 인공적인 노력, 이런 면에서 라쿠고는 마치 잘 가꾼 일본의 정원과 마찬가지로 일본인의 독특한 미의식을 보여주는 전형적 예가 아닌가 생각한다.
라쿠고를 내가 처음 접한 것이 언젠지는 가물가물하다. 아마도 1995년 잠시 동경에서 혼자 지내던 무렵이 아닐까 생각된다. 당시는 가족과 떨어져 지내던 시절이기도 해서 숙소에서는 일본어를 연습한다는 핑계로 늘 TV를 틀어놓은 채로 지냈다. 드라마에는 흥미를 못 느껴서 채널을 돌리던 중 만난 것이 라쿠고였다. 접는 부채 하나만 달랑 들고 나타난 화자가 무대 중앙에서 정좌하고 정중히 절을 올린 후 말문을 여는 모습에 왠지 끌리게 되었다. 솔직히 처음부터 내용을 다 알아들었던 것은 아니다. 아직도 특히 고전(古典)라쿠고는 의미를 미처 반도 이해하지 못한 채 넘기는 경우가 태반이다. 칠십을 바라보는 이 나이에도 일본어공부에 대한 욕심이 불끈 치밀어 오르는 순간이기도 하다.
사실 라쿠고를 직접 관람한 것은 딱 한번 밖에 없다. 7, 8년 전 어느 날 동경대 칸사쿠(神作裕之)교수와 우연히 잡담을 나누던 중 개인적으로 라쿠고에 매력을 느낀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는 내 말에 깜짝 반색하며 마침 자신도 라쿠고를 좋아하니 한번 “요세”(寄席: 라쿠고 등의 대중공연시설)에 가보자고 이끄는 것이었다. 평소 진지하기 짝이 없는 그가 라쿠고 팬이라는 것이 좀 뜻밖이긴 했지만 슬그머니 호기심이 동해서 염치불고하고 그를 따라 아사쿠사에 있는 전용극장에 가보았다. 이삼 백 명은 너끈히 수용할 수 있는 크기의 홀이었지만 그날 손님은 이십 명 정도에 불과했다. 간혹 웃음이 터지기는 했으나 TV에서 보는 것 같은 왁자지껄한 분위기는 전혀 아니어서 슬며시 라쿠고의 장래에 대한 걱정이 들기도 했다.
라쿠고에 관한 알량한 지식을 뽐내며 이렇게 사설을 장황하게 늘어놓은 것은 걸핏하면 일본을 깔보는 악습을 떨치지 못하는 부박한 세태에 대한 유감에서 비롯된 면도 있지만 보다 직접적으로는 동경대 상법교수였던 타케우치(竹內昭夫)교수(1929-1996)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이다. 이를테면 마쿠라가 길어진 셈이다. 1970-80년대에 일본 상법학계를 리드했던 타케우치 교수는 나와 각별한 관계인 이와하라(岩原紳作), 칸다(神田秀樹)교수를 비롯한 쟁쟁한 학자들의 스승이다. 내가 그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석사학위 논문을 준비할 당시에 읽은 class action에 관한 논문을 통해서였다. 그 논문에 이어서 접한 것이 그가 영미법의 타나카(田中英夫)교수(1927-1992)와 같이 쓴 “법의 실현에 있어서 私人의 역할”(法の実現における私人の役割)이란 논문이었다. 이 논문을 읽고서는 더 깊은 감명을 받았다. 나는 이 논문이야말로 비교법연구의 모범을 보여주는 역작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게 더 강렬한 인상을 준 것은 어느 좌담회에서 한 그의 발언이었다. 40년이 넘은 일이다보니 기억이 희미하지만 요컨대 상법연구에 자신의 인생을 불사르지 못한 것이 유감이라는 취지의 말이었다. 당시 만23세의 새파란 나이로 삶을 어떻게 살아갈지 아무런 생각이 없었던 나로서는 상법 같은 기술적인 분야의 연구에 어떻게 소중한 인생을 선뜻 걸 수 있는 것인지 너무 실감이 나지 않았다.
이런 타케우치교수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1986년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는 길에 동경대를 방문했을 때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나보다 2년 연상인 이와하라교수를 학문의 선배로 따르고 있다. 동경대 연구실로 이와하라교수를 찾았을 때 그는 나를 스승인 타케우치교수의 연구실로 안내했다. 10년 전 발간한 “기업지배구조와 법”이란 책 서문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타케우치교수는 병고로 몸은 수척했지만 눈빛은 형형했다. 의자에 앉자마자 대뜸 독일어로 말을 걸어오는 바람에 당황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앞서 언급한 자신의 논문을 읽고 감명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했더니 활짝 웃으며 기뻐했다. 나중에 그 논문이 책으로 나왔는데 말미에 첨부된 대담에서 내가 한 이야기를 언급한 걸 보면 그 말이 어지간히 반가왔던 모양이다.
타케우치교수가 동경대에 재직하는 동안 같은 상법담당으로는 오오토리(鴻常夫)교수(1924-2016)가 있었다. 나도 내막은 잘 모르지만 두 사람 사이는 별로 좋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타케우치교수는 오히려 경도대의 타츠타(龍田節)교수(1933~ )와 각별한 친분을 유지했다. 두 교수의 스승인 스즈키(鈴木竹雄)교수(1905-1995)와 오오스미(大隅健一郎)교수(1904-1998)가 서로 가까왔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타츠타교수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소개할 기회가 있기를 바라지만 두 사람은 학문적으로 정말 많은 일을 함께 해냈다. 둘이서 펴낸 수많은 책들 중에서도 특히 괄목할 것은 판례교재 회사법이다. 1972년 초판 서문에 의하면 자신들이 그런 교재를 내기로 합의한 것이 5년 이상 전이라고 하니 이들은 이미 30대부터 전통적인 강의방식에 회의를 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각자 이 책을 기초로 문답식 강의를 시도했다고 하는데 그 후 후속판이 나오지 못한 것을 보면(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1985년에 나온 제2판 5쇄이다) 역시 그것이 쉽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내 개인적으로 두 교수에 대해서 갖는 느낌은 비슷하다. 글을 읽으면 대번에 느껴지는 것이 저자의 두뇌의 명석함이다. 논리가 단순명쾌할 뿐 아니라 인간미까지 풍기는 구어체의 단문은 읽는 즐거움을 더해준다. 두 사람의 또 하나의 공통점은 – 나는 직접 경험할 기회가 없었지만 – 모두 성격이 칼 같은 일면을 지녔다는 점이다.
타케우치교수는 수많은 일화를 남겼다. 가장 유명한 것은 좋은 학자가 되기 위한 조건에 대한 이야기다. 그는 첫째는 체력, 둘째는 근성이라고 한 후에 셋째 조건에 이르자, 그렇지만 머리가 나쁘면 “곤란하다”(困る)고 말했다는 것이다. 타케우치교수의 직설적인 성품을 보여주는 일화는 스승인 스즈키교수와 관련된 것이다. 일본에서는 최고재판소 재판관 중 한명 정도는 동경대나 경도대의 퇴임교수로 임명하는 관행이 있다. 스즈키교수가 퇴임할 무렵 최고재판소에서 재판관 영입의 움직임이 있었던 모양이다. 소문을 들은 타케우치교수는 바로 스승을 찾아가 재판관은 다른 사람도 할 수 있으니 선생은 상법개정작업을 주도하는 역할을 맡아달라는 취지로 설득했다고 한다. 그의 설득이 주효해서인지 결국 스즈키교수는 최고재판소행을 포기했고 그 대신 오오스미교수가 재판관이 되었다. 그밖에도 많은 이야기를 들었는데 불행히도 대부분 잊어버려 옮길 수가 없다. 강의를 할 때에는 지각한 학생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강의실 문을 잠궜다는 이야기도 들은 것 같은데 진위는 확인을 요한다. 이와하라교수는 스승의 총애를 듬뿍 받는 동시에 적지 않은 스트레스도 받고 있는 듯했다. 학부시절 회사법 강의 전날은 거의 밤을 새우다시피 예습을 했다는 말이나 또 다른 사람을 믿지 못하는 타케우치교수가 늘 자신에게 “이것도 네가 하고 저것도 네가 해라”라며 시키는 바람에 학회 발표를 도맡다시피 했다는 말이 기억난다. 언젠가는 자기는 일 년에 논문을 여섯 편정도 밖에 못쓰는데 타케우치교수는 열편이나 쓴다고 탄식을 하기도 했다. 일년에 세편 정도가 고작이던 나는 그 말을 듣고 뜨끔할 수밖에 없었다.
나를 “요세”로 이끌었던 칸사쿠교수도 타케우치교수의 제자이다. 나이로 미루어 아마도 거의 마지막 제자가 아닌가 생각된다. 라쿠고 관람 후 둘만의 저녁 자리에서도 타케우치교수가 화제에 올랐다. 타케우치교수는 젊었을 때부터 옛날 학자들의 직업병이라고 할 수 있는 폐결핵으로 오래 고생했는데 요양을 위해 병원에 장기입원도 몇 차례 했던 모양이다. 예로부터 폐병에는 초조함이 금물이라 이를테면 큰 다라이(일본말인줄 알았는데 찾아보니 순 우리말이란 설도 있다)에 붕어를 풀어놓고 종일 붕어를 지켜보면서 소일해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상법연구를 위해 일생을 바칠 각오였던 타케우치교수와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생활이 아닐 수 없었다. 칸사쿠교수는 요양 중인 타케우치교수의 부탁으로 라쿠고 테이프를 몇 차례 가져다 준 적이 있다고 했다. 타케우치교수 말로는 라쿠고가 강의에도 도움이 된다고 했다는 것인데 나는 바로 그 대목이 흥미로웠다.
라쿠고나 강의나 듣는 이들의 관심을 끌어가는 화법이 생명이라는 점이 공통된다. 강의를 막 시작한 초년병 시절 강의는 연극과 비슷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강의를 하다보면 마치 무대에 선 배우와 마찬가지로 청중인 학생의 반응을 직접 느끼게 된다. 학생들의 눈만 봐도 이들이 지적 흥미를 느끼고 있는지 아니면 따분해하고 있는지, 내용을 잘 따라오고 있는지 아니면 혼란스러워 하고 있는지를 금방 알아챌 수 있다. 어느 쪽인지에 따라 강의실을 나서는 발걸음에 힘이 솟거나 반대로 맥이 빠지게 된다. 내게는 다행히 그런 일이 없었지만 맥이 빠지는 날이 계속 이어진다면 강의실에 들어가는 것이 자연히 싫어질 수밖에 없다. 숙명적으로 강의를 해야만 하는 교수로서 이는 정말 끔찍한 일이다. 연기를 힘겨워하는 배우가 행복해질 수 없는 것처럼 강의를 피하고 싶은 교수도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없다. 어차피 교수로서의 삶을 포기할 것이 아니라면 청중의 관심을 끌어내는 수법에도 조금은 신경을 쓸 필요가 있을 것이다. 타케우치교수는 편리하게도 라쿠고에서 그런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었으니 일석이조란 바로 이런 경우를 일컫는 말이라 하겠다.
며칠 전 유투브에서 우연히 “카츠라 분시”(또는 후미에)(桂文枝: 원명은 桂三枝)란 유명한 落語家가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커다란 극장에서 관객 없이 공연하는 동영상을 본 일이 있다. 혼자서 하는 연기라는 점에는 다름이 없는데 평소와 달리 객석의 반응 없이 마쿠라를 풀어가는 모습이 어색하고 힘들어서 도저히 참고 볼 수 없었다. 혹시 온라인 강의를 해야 하는 후배교수님들도 비슷한 어려움을 겪고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문득 머리를 스쳤다. 눈앞에 청중이 없는 상태에서 강의한다는 점에서 온라인 강의는 연극보다는 영화나 TV출연에 더 가까운 것일수도 있다. 간혹 영화나 TV의 인기스타가 과거 자신이 몰입했던 연극에 미련을 버리지 못해 오래 만에 다시 무대에 선다는 기사를 접하곤 한다. 아마도 지척에서 자신의 몸짓을 숨죽여 바라보며 웃고 울던 관객의 반응에서 느끼던 쾌감을 잊지 못해서가 아닐까? 벚꽃 만개한 봄이면 눈빛 반짝이던 신입생들로 가득한 강의실로 발걸음을 재촉하던 초년시절 내 모습이 아련하다. 후배교수님들이 하루빨리 그 즐거움을 다시 되찾을 수 있기를 빈다.(2020.4.4)
재미있군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타케우치 교수의 “법의 실현에서 사인의 역할”은 단행본으로 우리 도서관에도 있더군요. 학생들의 눈빛과 반응을 보지 못하고 강의하려니 처음에는 힘들고 흥이 안 났는데, 채팅창으로 반응을 유도해가면서 하니까 훨씬 나아졌습니다. 학생들은 말보다 채팅을 오히려 더 편하게 느끼는 것 같더군요. 그래도 얼른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반세기도 전에 쓴 논문이니 이제 법의 내용은 많이 변해 읽을 가치는 거의 없어졌을 것입니다. 내 흥미를 끈 것은 저자들이 일본법에 비추어 미국법의 특징을 논한 부분이었습니다. 국제학계에서 enforcement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 훨씬 전에 이미 그 부분에 주목했다는 점이 그 논문의 선진성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다른 글들도 그렇지만 이 글은 여기에 만 남겨두는 게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들고, 매경같은 데 실어서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싶습니다. 이 글에 나오는 라쿠코 이야기에 관한 선생님의 일화는 저도 2년 전에 동경대에 체류할 때 이와하라 선생님, 간사쿠 교수님과 나누었습니다. 두 분과 선생님의 일어 실력, 라쿠코의 이면에 있는 유머까지 이해하는 것에 대해 감탄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저도 자극을 받아서 JLPT도 보고 자주 NHK를 틀어놓고 있는데, 뉴스나 드라마와는 달리 라쿠코는 저 대목에서 왜 웃는지 이해하기 어렵더군요. 다케우치 교수님이 ‘머리가 나쁘면 곤란하다’는 말은 최고수준에 이르기 위한 외국어 공부에도 적용되는 것 같아요.
다케우치 교수님에 관해서는 이와하라 선생님께서도 자주 아마도 ‘그리움에 젖어’ 말씀하셨는데, 선생님의 글을 읽으니 그 분의 학자로서의 매력때문에 생전에 한번 뵈었더라면 좋았겠다 싶어요.
‘법에 있어서의 사인의 역할’은 선생님의 기업지배구조 서문을 읽고나서 바로 구매했는데, 얇은 책이지만 집단소송뿐만 아니라 대표소송, 손해배상부분에서도 깊은 감명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아직도 유효한 책인 것 같아요.
다케우치/다츠마 이 두분이 편집한 동경대 출판부에서 나온 “현대기업법강좌”시리즈를 간혹 참조하는데, 이 두 분이 소속학교는 다른데 일을 함께 하시는 것을 보면서 고수끼리는 통하는 건가 막연히 생각했는데 그 이유를 알겠습니다. 이 책은 1985년(?)에 나왔는데, 일본에서는 이 때 벌써 이런 현대적으로 쓰인 책이 나왔다는 걸 보고 놀랄 수 있습니다.
코로나때문에 몸도 마음도 많이 지친 5월 어느날, 일본의 선학자들, 선생님이 걸어오신 길을 생각하며 아직 시간이 남아 있을 때 많이 읽고 더 많은 것을 알아야 겠다는 욕구가 한층 더 강해졌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