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변호사의 딜레마

20년 전 “기업변호사의 역할과 윤리”란 글을 발표한 일이 있다(서울법대 편, 법률가의 윤리와 책임 (2000 박영사) 240면). 미국에서는 로펌변호사와 사내변호사를 아우르는 의미로 business lawyer나 corporate lawyer란 용어를 사용하는데 나는 대신 기업변호사란 용어를 사용했다. 내 글은 당시 우리 법조계에서 급속히 성장하고 있는 기업변호사에 관한 생각을 정리한 것이었지만 20년이 지난 현재 기업변호사의 비중은 이젠 압도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커졌다. 오늘은 미국에서 기업변호사가 마주하는 현실적인 문제를 논한 글을 소개하기로 한다. Donald C. Langevoort, Gatekeepers, Cultural Captives, or Knaves? Corporate Lawyers Through Different Lenses (2019) 저자인 Langevoort(그의 동료인 Thompson교수가 “랭보트”로 발음한다고 가르쳐 주기 전까지는 발음이 늘 궁금했다)는 Georgetown의 증권법 교수로 심리학적 접근방식을 많이 활용하는 학자이다. 2006년 5월 버클리에서 개최한 학술대회에서 우연히 한번 아침식사를 같은 테이블에서 한 일이 있는데 깐깐한 사람이란 인상을 받았다.

미국에서는 기업변호사의 문지기 역할이 강조되고 있지만 실제로 기업변호사가 그런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다. 이 논문은 왜 기업변호사가 고객의 부정을 막지 못하고 동조하게 되는가에 관한 직업윤리 문제를 논한다. 저자는 두 가지 목표를 설정하고 있는데 ➀하나는 기업변호사가 부정에 동조하게 되는 과정에 대해서 살펴보는 것이고 ➁다른 하나는 로펌변호사가 비리방지에 소극적인 상황을 보다 적극적인 사내변호사을 통해서 보완할 가능성에 대해서 검토하는 것이다. 솔직히 우리 관점에서는 아직 ➁보다는 ➀이 더 절실한 면이 있다는 점에서 이 포스트에서는 ➀에 집중하기로 한다.

로펌변호사가 고객이 원하는 바에 맞추어 법률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다. 저자는 이런 현상이 심화되고 있는 이유를 기업변호사들 사이의 경쟁의 심화에서 찾고 있다. 특히 사내변호사들의 성장에 따른 로펌사이의 경쟁심화는 우리나라에서도 발견되는 현상이라는 점에서 흥미를 끈다.

저자는 특히 좋은 사람이 갑자기 나쁜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점점 더 나쁜 행동에 빠지게 된다고 보고 그런 변화의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흥미로운 대목은 사람들은 윤리적으로 문제 있는 측면은 의식의 영역에서 밀어내는 경향이 있고 의식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 의식적으로 합리화하는 경향이 있다는 지적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처음에는 사소한 위반을 합리화하는 것에서 시작해서 차츰 자신이 취할 수 있는 행동의 범위를 넓혀가다가 궁극적으로 심각한 위법행위를 저지르게 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런 현상을 slippery slope라고 부르는데 특히 과도한 자신감을 가진 CEO와 CFO가 있는 기업일수록 쉽게 첫 단계의 위반행위를 저지르고 마침내 곤경에 빠지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이 같은 slippery slope현상은 기업변호사들에게도 흔히 발견된다고 한다. 변호사들은 직업의 성격상 문제해결에 대한 고객들의 기대에 애써 부응하려는 경향이 있다 보니 고객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 사소한 위반행위를 저지르기 쉽다는 말, 격무로 인한 피곤과 경쟁의 스트레스가 겹치다 보면 유혹을 뿌리치기 어렵게 된다는 말, 해석의 여지가 큰 모호한 법원칙도 기업변호사가 유혹에 빠지기 쉽게 만든다는 말은 모두 설득력이 있게 느껴진다.

이 글은 솔직히 이해하기 쉬운 글은 아니다. 도처에서 인용하는 심리학 연구결과가 법적 논리와 깔끔하게 맞아떨어지지 않는 구석이 많고 또 아직 현상에 대한 논의가 충분히 진전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에세이적 색채가 강한 이런 논문을 굳이 소개하는 이유는 현상 자체가 우리에게도 중요하고 여러 가지로 시사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끝으로 간단한 소감 두 가지. 저자는 글을 Clark Clifford라는 과거 정부고위직을 두루 경험한 유명변호사의 일화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Clifford는 말년에 BCCI스캔들에 말려들어 곤욕을 치르고 화려한 경력에 오점을 남겼다. 동서고금을 통해서 이런 사례는 부지기수지만 늘 남의 일로만 치부하기 쉽다. 또 한 가지, 이 글을 읽고 문득 Langevoort교수와 박준 교수의 공통점에 생각이 미쳤다. 80년대 박교수가 Harvard 유학시절 마침 그곳에 교환교수로서 가르치던 Langevoort교수는 박교수의 석사논문 지도교수를 맡았다. 그 당시 가르침의 영향과는 무관하겠지만 박교수는 뒤늦게 서울대에서 금융법 외에도 법조윤리의 연구와 강의에 공을 들였다. 스승과 제자사이의 묘한 인연을 느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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